목차/차례
Ⅰ. 서문
Ⅱ. 한민족의 역사를 왜곡한
세 가지 해독
1. 중독(中毒) _ 사대주의사관
2. 왜독(倭毒) _ 식민주의사관
3. 양독(洋毒) _ 실증주의사관
Ⅲ. 끝으로
참고문헌 및 사이트
Ⅰ. 서문
1999년, 전국의 초등학교 수백여 곳에 세워진 단군상이 하루아침에 여기저기에서 목이 잘린 채 발견 되었다. 불과 수년 전 전국의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단군상 훼손사건은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0여 년 전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단군신화를 근거 있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32%였다. 그렇다면 지금은 과연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뿌리를 알지 못하고 역사의식을 잃어버리면 그 나라의 미래를 기약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10월 3일 개천절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있으면서도 국조 단군의 역사성을 확신하지 못하는 나라, 우리 사회의 역사 인식이 이렇게 된 ...
본문/내용
목 차
Ⅰ. 서문
Ⅱ. 한민족의 역사를 왜곡한
세 가지 해독
1. 중독(中毒) _ 사대주의사관
2. 왜독(倭毒) _ 식민주의사관
3. 양독(洋毒) _ 실증주의사관
Ⅲ. 끝으로
*참고문헌 및 사이트
Ⅰ. 서문
1999년, 전국의 초등학교 수백여 곳에 세워진 단군상이 하루아침에 여기저기에서 목이 잘린 채 발견 되었다. 불과 수년 전 전국의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단군상 훼손사건은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0여 년 전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단군신화를 근거 있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32%였다. 그렇다면 지금은 과연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뿌리를 알지 못하고 역사의식을 잃어버리면 그 나라의 미래를 기약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10월 3일 개천절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있으면서도 국조 단군의 역사성을 확신하지 못하는 나라, 우리 사회의 역사 인식이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낸 안호상 박사는 10여 년 전에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지식인들이 중독(중국의 해독)과 왜독(일본의 해독)과 양독(서양의 해독) 등 3독에 빠져 있으며, 이 3독을…
는 기록이 있다. 이때부터 모든 관직이나 명칭에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모든 복장제도를 중국같이 바꿔 버렸다.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때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한국인의 가치관과 뿌리가 송두리째 뽑히고, 오직 중국에서 뿌리와 사상을 찾으려는 정신의 식민지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고려 후기 때 편찬된 일연의 『삼국유사』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삼국유사』는 『위서』와 『고기(古記)』에 나와 있는 기록들을 인용하여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또 고조선의 건국시기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역사책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고조선조에 『고기』를 인용한 구절에 석유한국(昔有桓國 :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의 환국에 대해 주를 달면서 환국과 불교의 환인이 글자가 비슷해 보이므로 `위제석야(謂帝釋也)라` 하여, 환인천제의 환국을 불교의 제석환국으로 바꿔놓았다.
또 환웅천황이 내려오신 태백산(지금의 백두산)을 지금의 묘향산이라 하였고, 단군 왕검의 도읍지 아사달(阿斯達)을 지금의 평양이라고 하는 등, 배달국과 고조선의 광활한 영역을 반도 안으로 축소해 버렸다는 점에서 민족사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당하고 있다.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던 고려시대 때 이러했다면, 유교를 국교로 삼았던 조선시대 때는 더 말할 나위도 없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서거정의 『동국통감』을 보면, 단군조선의 역사를 다루긴 하지만 저 바깥으로 떼어놓고는 다른 나라 역사처럼 다뤄 . 정통으로 다루지는 못 했다.
또한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는 우리의 역사를 `기자(箕子)`로부터 시작한다. 단군왕검의 사적은 기자동래(箕子東來)의 밑에다 적고 있다. 그 외에 정인지의 『고려사』, 한백경의 『동국지리』, 한치윤의 『해동역사』, 정약용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등 우리나라의 역사가 대부분이 역사를 왜곡시켜 놓았다.
유교는 중국 중심주의를 표방한다.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요 우리는 동쪽의 오랑캐라는 화이관(華夷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사대주의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