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이 글의 목적
이 글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한 올바른 재인식을 하게 하고 문화 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게 하려는 글쓴이의 목적을 본받아 우리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의 문화 전통을 먼저 알고, 이에 대한 생각을 해보기 위해 이런 글을 쓰게 되었다.
2. 이 글의 요약
* 고려 초기의 불교 형태
태조의 신앙 : 태봉국왕(泰封國王) 궁예(弓裔)의 신하였던 왕건(王建, 877~943)이 여러신하들의 추대로 고려의 태조가 되었다. 태조는 왕위에 오르자, 고려국을 건설하게 된 것은 오직 불법의 힘에 있었다고 믿고 깊이 불교에 귀의하였다. 그리하여 나라의 번영을 위해 더욱 불교 옹호에 힘쓰는 한편 만은 사탑(寺塔)을 세우고,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켰다. 즉위 원년 겨울에는 팔관회를 열어 연례행사로 삼고,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고 열 개의 큰 사찰을 세웠으며, 또 불사와 탑상의 낡고 허물어진 곳을 다시 고쳤다. 그 외에도 여러 사찰을 지었다. 태조는 일찍부터 경유와 충담 등을 왕사로 삼고 현휘를 국사로 삼았으며 여러 고승을 우대하였다. 이처럼 왕건이 건설한 고려 왕조는 집권 초기부터 불교를 중시하여 외면상 불교 국가를 형성하였고, 더할 수 없는 불교 전성 시대를 이룩하게 되었지만은, 고려인들이 부처에게 복을 비는 타력적 …
제3대 정종 : 정종 (定鐘, 946~949)는 선왕인 태조가 존숭하던 본을 그대로 따라 더욱 불교를 발전시켰다.
제4대 광종 : 광종 (光宗, 949~975)은 대보은사를 궁궐 남쪽에 세우고, 불일사를 동쪽 교외에 세우며, 숭선사를 새로 짓는 등의 일을 하며 또한 958년에는 과거를 채택하였는데, 시부송 시무책등과 같이 진사를 뽑을 뿐 아니라 승과를 새로 두고 선사, 대선사, 중대사, 삼중대사 등의 계위(階位)도 만들었다.
입으로 인해 송악은 글안병의 수중으로 넘어갔는데 이때 현종이 군들과 함께 불력을 빌어 적을 물리치려고 시작한 것이 대장경판의 각인이며, 이 경판은 부인사에 보관되었다. 그 때 50축의 비장문이 조각되었고, 십만 송의 글안경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후에 의천이 기록하였다. 현종때에도 불사가 많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당시의 이러한 불교행사와 아울러 대장경의 간행 및 많은 사찰과 탑의 건립 등도 이러한 국난을 극복하려는 호국적인 신앙심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정종(靖宗) : 굉곽선사가 안심사의 동남쪽에 24개의 대가람을 세우고 3.000여명의 승려를 이끌고 선문을 크게 진흥하였다. 그리고 왕의 생일을 맞이하면 전국의 각 사찰에서는 기복도량을 개설하였으며, 윤경회라는 모임도 있었는데 이는 때로 관리들이 민폐를 끼치고 취렴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문종 즉위 10년에 내린 교서가 있는데 그 교서에 내용으로 보아 그 당시의 불교가 얼마나 부패하였는지 알 수 있기도 하다. 고려의 귀족문화의 융성과 아울러 귀족불교로서 크게 번성한 불교계에서는 차차로 사치와 타락의 기운이 일어나게 되어 불교의 본 정신과는 거리가 멀어져 가게 되었다.
의천(義天) 과 묘청(妙淸) : 의천은 문종 9년에 제4왕자로 태어났다. 왕은 19년 5월 14일 의천 11세의 어린나이에 경덕국사 내전으로 불러 의천의 머리를 깎게 하고 경덕과 같이 영통사에서 수업하도록 하였다. 문종이 의천에게 우세라는 호를 내리고 승통의 직을 수여한 것이 그의 나이 13세 때의 일이다. 이때에 송나라에서는 선종이 크게 유행하여 유명한 고승과 석학들이 많이 있었다. 이에 의천은 송나라로 유학할 뜻을 품었다. 송나라 철종은 그를 극진히 맞아 동경의 각염사의 고승인 화엄법사 유성을 스승으로 삼아 전태, 화엄 두 종파의 묘의를 배우게 되었다. 상국사로 가 원소종본을 만나 본 다음, 흥국사로 가서 인도의 길상삼장으로부터 범서를 배우며 화엄종의 고승인 정원 밑에서 화엄의 근본을 깨우쳤다. 그리고 나서 50여 명의 고명한 스님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