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배경
영국 사람들은 도버해협이라고 하고, 프랑스 사람들은 칼레해협이라고 일컫는 영불해협의 정식명칭은 `채널(Channel)`이라 하며, 이 해협을 육로로 연결시키는 터널의 공식명칭은 `채널터널(Channel Tunnel)` 또는 채널과 터널을 합성한 신조어인 `처널(Chunnel)` 로 명명된다.
사실상 유로 터널(Euro Tunnel)이라는 명칭은 이 터널의 건설과 유지관리를 전담하는 민간회사의 이름이다. 이 회사는 영ㆍ불 양국정부로부터 건설공사 준공 후 운영, 유지관리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권한을 착공시점부터 55년 동안 위임받아 관리한 후, 2042년에 양국 정부에 소유권을 넘겨주게 된다.
유로 터널사는 150억불에 달하는 막대한 공사비를 정부의 자금지원이나 보증 없이 주식공모와 은행융자로 조달했다. 이 공사는 국가간의 초대형 인프라건설을 순수민간자본이 주도한 대표적인 사례인 것이다. 그러나 `94년 터널의 개통이후,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심각한 경영난으로 인해 파산위기에 직면했었다. 당시 보도에 의하면 건설공사와 관련하여 채무액만 약 750억 프랑(한화 12조원)이고, 한해 지불이자액만 60억 프랑(한화 9600억원)이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96년 12월에는 터널 내부에서 차량화재사고가 발생하여 승객과 화물량이 격감하는 사태를 맞기도 했었다. 그러나 최근의 외신에 의하면, `97년도에 이뤄진 유로 터널사의 구조조정에 이어, 최근 들어 승객과 화…
2. 건설추진 역사
유로 터널은 영국과 프랑스 해협을 연결하는 터널로서 2개의 철도터널과 1개의 서비스터널로 구성되어 있고, 총 길이는 50.45km이고 해저부분의 길이는 38km이다.
유럽 대륙과 섬나라 영국을 육지로 연결시키려는 계획은 19세기 부터 계속된 엔지니어들의 염원이었다.
3. 19세기, 건설논쟁과 시도
이 당시 영국정부측의 반대에 관한 일화 한 토막.
4. 20세기, 꿈의 실현 과정
nd)은 이 터널 건설계획에 관심을 가진 뒤 무려 40년을 여기에 몰두했다. 그는 직접 수십 번의 바다 속 잠수를 통해 수심측량을 하여 해저의 등고선 지도를 만들고, 또한 해저지층이 터널 굴착에 적합한 백악기층이란 사실을 밝혀내었다.
1856년 드 가몽은 영국의 포크스톤과 캡그리스 구간의 철도용 터널 건설 계획을 제안하였다. 그 이후 1868년 영국 엔지니어 로우, 브럼리, 호크쇼와 공동으로 발전된 터널 계획을 발표했다.
이 당시 영국정부측의 반대에 관한 일화 한 토막.
「1858년에 토메 드 가몽이 영국을 방문하면서 만난 로드 파머스톤 수상은 이 프랑스 공학자에게 "뭐라고요! 우리는 지금도 너무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당신은 그 거리를 더 가깝게 하는 공사에 우리더러 참여해 달라고 하고 있군요!" 하는 말로 그 당시 섬 상태 그대로 영국이 남아 있는 것을 바라는 많은 영국인들의 의견을 대변했다. 같은 해에 버밍엄제폭탄으로 나폴레옹 3세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도 해협에 해저 터널을 놓는다는 일에 대한 관심이 식어 버렸고, 또한 대륙의 침략에 대한 영국 사람들의 공포도 다시금 살아났다.」*주1
■1870년 - 채널터널주식회사가 양국에서 조직됨.
1860년부터 1880년 사이, 클로넬 F. 뷰몽에 의한 보링머신의 발명과 아더 잉글리쉬에 의한 후속개발 즉, 회전식 굴착선단부, 파쇄한 버럭의 콘베이어운송시스템, 압축공기시스템에 의한 굴착 기계는 현대 터널 공법의 기본 모델을 제공.
■1880년 - 당시 개발된 굴착 기계로 영불해협양안에서 터널 굴착 개시됨.
영국의 도버 쪽에서 2,000m 굴착과 프랑스의 칼레 쪽 1,600m 굴착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영국의회의 반대로 무기한 중단됨.
4. 20세기, 꿈의 실현 과정
■1904년 영불협력의 새로운 전기를 맞음, 철도기술의 발전으로 터널 건설에 대한 다양한 계획들이 제안됨.
■1922년 - 포크스톤에서 휘태거가 발명한 보링머신에 의한 시험 굴착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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