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Ⅰ. 서 론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키 워드를 꼽는다면, 분업과 교환이다. 스미스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적 분업과 교환은 모든 경제 활동의 시발점이 되고, 이것의 영향으로 사회·정치 활동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는 근대 경제 질서를 상업사회라 부르기도 했다.
이러한 스미스의 생각은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그가 활동하던 유럽의 18세기는 근대화의 물결이 한창 전개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나태와 무관심 등 전통 사회의 불합리한 관습에서 탈피해, 서서히 자율성, 절약, 근면, 성실 등 합리적인 국민 의식이 함양되어 갔다. 또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신흥 자본가들이 자본을 축적하여 빈곤에서 벗어나는 한편, 시장과 교환의 범위가 확대되어 산업혁명의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도 공공 정책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가부장적 국가관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중상주의적 대외 무역 정책을 포함해 국가의 정책들은 전반적으로 세세한 부분까지 규제와 통제 중심의 성격을 띠었다. 여기서 우리는 스미스의 사상과 태도가 시대적 조류와 경제사적 배경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학적 경제학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발간한 1776년이라고 답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경제학 분야를 대표하는 한 권의 고전을 선택하라고 할 때도 스미스의 ‘국부론’을 선택하는 사람이 가장 많을 것이다.이와 같이 스미스의 ‘국부론’이 가장 대표적인 경제학 저작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특징적인 모습을 체…
Ⅱ.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스미스의 두
3-1790)
스미스는 1723년 스코틀랜드의 작은 항구 도시 커콜디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복자로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아버지의 얼굴조차 몰랐지만, 아버지가 남겨 준 막대한 유산과 어머니의 헌신적인 가르침으로 별 어려움 없이 자랄 수 있었다. 한때 목회자가 되려는 생각에 1737년 열네 살의 나이로 글래스고 대학에 입학했고, 열일곱 살에 옥스퍼드 대학의 밸리올 칼리지(Balliol College)로 옮겼다. 그러나 이때 그의 관심은 성직자의 임무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로마 시대의 고전과 언어학 등에 치우쳐 있었다. 그리하여 학업을 그만두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그는 스코틀랜드 문화 운동의 후원자였던 케임즈 경의 후원을 받아 1748년 에든버러에서 수사학과 문예 비평, 법의 역사 등을 강의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명성을 얻은 스미스는 1751년 모교인 글래스고 대학에서 논리학과 수사학을 가르쳤고, 1752년에는 그 당시 도덕 철학을 담당하던 은사 F. 허치슨 교수가 세상을 떠나면서 도덕 철학까지 맡게 되었다. 그리고 7년 뒤인 1759년에는 ‘이기적 욕망을 갖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세상이 어떻게 추악하게 타락하지 않을 수 있는가.’를 탐구한 도덕 감정론을 펴냈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유럽 전역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1764년 스미스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귀족 청년의 가정교사가 되어 유럽 전역을 돌며 견문을 넓혔다. 이렇게 3년여 동안 이곳저곳을 떠돌던 그는 1767년 고향으로 돌아와 런던을 오가며 국부론을 집필하는 데 몰두했다. 그리고 케네(F. Quesnay, 1694~1774)를 비롯한 주요 중농주의 경제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자유방임주의 사상을 배웠다. 그리하여 그는 국가가 경제에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는 자유방임주의 사상에 대해 공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농학파가 농업만 중시하고 공업과 공업 노동력을 무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척 한심하게 생각하여 이를 철저히 거부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1776년에 출간된 국부론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스미스의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