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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뛰세의 이론적 반휴머니즘과 주체
1. 이론적 반휴머니즘에 대한 비판
알뛰세는 마르크스의 자본에 대한 분석은 탈인간화된, 인간성이 부재한 노동자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사회의 경제적으로 쭈어진 시기”로부터 시작한다고 본다. 사회구성체를 전반적으로 구조지우는 생산관계를 강조하는 ??자본??에서 마르크스는 개인들을 “경제적 범주들의 인격화, 특수한 계급관계와 이해의 구현”으로 다룬다. 알뛰세는 마르크스의 과학적인 방법은 이처럼 이론적 휴머니즘에 반대한다고 논증한다.
물론 알뛰세도 마르크스가 생상과정에 참여하는 인간의 능동적인 측면을 사상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생산과정에서 개인의 능동적인 측면을 사상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생산과정 속에서 개인의 구체적인 활동과 개성을 사상하는 자본주의적인 관계의 특수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개인을 이론적인 환원을 통해서 익명의 교환가능한 대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왜 마르크스가 인간들을 이러한 경우에 생산관계에 의해서 결정되는 관계의 “수행자 supports”, 생산과정에서 “기능의 담지자 bearer”로만 간주했는 가를 해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그가 구체적인 삶 속에서의 인간들을 단순한 기능의 담지자로 환원시키기 때문이 전혀 아니다. 그는 그들을 있는 그대로 고려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그들을 하부구조 속에서, 생산 속에서, 따라서 착취 속에서의 이러한 단순한 기능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중략) 만일 여러분이 프롤레타리아들이나 자본가들의 구체적인 개인적 결정들, 즉 그들의 자유나 그들의 개성을 이러한 이론적 “환원”(?poch?, reduction)에 종속시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개인들을 복종시키는 실천적 “환원”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알뛰세의 이론적 반휴머니즘이 반대하는 것은 우선 근원적 주체 origin…
2. 알뛰세의 철학에서의 주체
분리되어 있는 것 처럼, 계급투쟁 이전에 두 계급이 존재하는 것 처럼 생각한다. 각 계급은 자신의 특수한 존재조건에 따라 각자의 거주지에 살고 있다.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지만 걔량주의자들은 이를 계급투쟁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날 두계급은 서로 적대하게되고 급기야 서로 싸우게 된다. 계급투쟁이 시작되는 것은 오직 그 때 뿐이다. 그들은 서로 주먹질을 하고 점점 싸움은 첨예해 진다. 결국 피착취자가 이기거나(이것이 혁명이다), 아니면 지거나 (이것이 반혁명이다)한다. 사태를 아무리 이모저모 띁어봐도 여기에서는 같은 생각밖에는 없는 것이다. 계급투쟁은 오직 그 이후에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계급투쟁을 “인간”의 “자유”나 “초월”과 같은 개념과 연결시키는 이들은 상품가치라는 사회적 관계를 상품과 화폐의 자연적 속성과 동일시하는 것과 동일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계급투쟁이라는 생산과 그 분배에 뿌리밖은 사회적 관계인 계급투쟁을 인간의 자연적 속성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구성적인 주체로서의 인간”을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이해의 중심에 놓는 것은 역사를 인간본질의 실현이라고 보는 역사주의와 동일한 논리적 구조에 들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알뛰세는 궁극적으로 사회구성체를 규정하고 그것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 것은 계급투쟁이 뿌리를 두고 있는 “하나의 관계, 토대, 즉 하부구조와 분리될 수 없는 생산관계”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자연사의 일부로서 사회의 구조는 인간과 인간들 사이의 관계로 환원할 수 없고, “인간집단들과 사물들 사이의 관계와 그것에 관한 인간집단들간의 관계”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회적 관계는 인간들만을 문제삼지 않고 사물들, 즉 물질적 자연으로부터 끌어낸 생산수단들도 문제삼기에, 그 생산수단을 한 계급에 할당함과 동시에 인간들을 계급을 분할한다. 따라서 개인이 이러한 관계에 참여하는 능동성은 개인이 이러한 관계에 사로잡혀 있는 한에서이다.
따라서 사회를 설명하는 원리를 순전히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