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70년대 박정희 정권의 통일 정책
1. 배경
1960년대 고속 성장을 통해서 우리 정부는 북한에 대해 맞서도 되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이전까지의 통일 정책을 굳이 고집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당당히 밀고 나가면 되었고 그 결과 많은 통일 정책이 발표되었다. 한편 북한의 경제 사정도 70년대면 우리 나라와 거의 비슷한 정도의 능력이 있었고 아직 남한을 얕보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북한도 우리 정부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서 70년대 많은 정책과 많은 성과가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남한과 북한의 통일 정책이 차이가 있었다. 남한은 3단계 방침을 세우고 차츰차츰 올라가는 점진적 통일 정책 갖고 있었던 반면에 북한은 서로 거시적인 것부터 합의하여 통일을 이루는 방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북한 측의 제안이 남한 측의 입장에서 보면 터무니없는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되었고 북한 측에서는 남한 측이 통일 본질에 대한 문제를 회피한다고 서로 오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계적인 화해 물결도 역시 한 몫을 했다. 북한은 그 동안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세계 무대로 진출하려고 노력하였고 그 첫 번째 파트너가 남한이었다. 하지만 화해 물결 속에서는 직접 미국과 접촉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남한에 대한 의존도가 떨어지고 따라서 남한과의 외교에 힘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2. 통일 정책
1970년 8월 15일에 박정희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북한의 무력 적화 기도의 포기가 평화 통일 선결 조건임을 밝힘과 동시에 개발과 건설과 창조를 향한 선의의 경쟁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평화 통일 구상을 내외에 선언하였다. 이 선언은 한반도의 통일이 외세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오로지 평화적, 자주적, 민주적으로 성취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이루어 진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① 인도적 견지와 통일 기반 조성에 기여할 수 있으며 남북의 인위적 장을 단계적으로 제거해 나갈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을 제시 시행할 용의가 있다.
② UN의 권위와 권능을 수락한다면 UN에서의 한국문제 토의에 북한이 참석할 것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③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그 어떤 체제가 국민을 더 잘 살수 있게 할 수 있으며 더 잘 살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사회인가를 입증하는 ‘개발과 건설과 창조의 경쟁’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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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인도적 문제부터 해결한다.
② 비정치적인 교류를 한다.
③ 정치적 문제의 합의를 통해 통일을 이룬다.
① 북한으로 흩어진 가족들과 친척, 친우들간의 자유로운 교재와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문제
②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과 친척, 친우들간의 자유로운 왕래와 서신교래를 실시하는 문제
③ 가족들을 찾아 주고 상봉을 마련해 주는 문제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회담할 용의가 있다.
구한 이 정책의 3단계 정책은 다음과 같다.
① 인도적 문제부터 해결한다.
② 비정치적인 교류를 한다.
③ 정치적 문제의 합의를 통해 통일을 이룬다.
1971년 8월 12일 위의 정책의 제 1단계로 보이는, 대한 적십자사 최두선 총재의 천만 남북한 이산가족 찾기 운동 제의가 있었다. 대한 적십자사는 이를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해 가까운 시일 안에 대한 적십자사 대표 회의를 개최할 것을 북한에 제의하였다.
“4반세기에 걸친 남북간의 장벽은 온갖 민족 비극의 원천이며 특히 남북으로 갈라진 이산가족의 비극일 뿐 아니라 금세기 인류의 상징적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이산 가족의 비극은 남북간의 장별이 해소됨으로써 완전히 종식될 것이나 이것이 단시간 내에 이룩되기 어려운 현실 아래 적어도 천만 남북한 이산 가족의 실태를 추인하고 이들의 소식을 알려주고 재회를 알선하는 가족 찾기 운동만이라도 우선 전개해야 하겠다.”고 하면서 남북한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협의 하자며 본 회담을 위한 절차상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예비 회담을 그해 10월 안에 제네바에서 개최하자고 하였다.
이에 대한 북한의 평양 방송은 1971년 8월 14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서한문을 보내 왔다.
① 북한으로 흩어진 가족들과 친척, 친우들간의 자유로운 교재와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문제
②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과 친척, 친우들간의 자유로운 왕래와 서신교래를 실시하는 문제
③ 가족들을 찾아 주고 상봉을 마련해 주는 문제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회담할 용의가 있다.
따라서 1971년 8월 20일 판문점 중립국 감독 위원회 회의장에서 남북한의 적십자간의 파견원 접촉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시작으로 판문점에서 25회에 걸친 상비 전체 회담과 16회에 걸친 비공개 실무 회담을 거쳐 평양에서 제 1 차 회담을 개최한 이래 1973년 7월 13일 까지 서울과 평양에서 7회에 걸친 본 회담을 개최하였다. 하지만 남한은 인도적 문제에 국한시켜 이야기하였고 북한 측은 반공법과 보안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