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한국의 현대사에 관한 이해
(제주4.3항쟁에 대해서)
(1) 이 주제를 선택하게 된 계기
먼저 한국에 현대사에 관한 수업은 2번째 수업으로서 간략하게 들어서 전체적인 맥락에 이해가 되도록 도움을 받았다. 우리나라 현대사에는 많은 사건들과 역사들이 있지만, 제주4/3항쟁은 6/25 한국전쟁 다음으로 가장 비극적인 살상과 파괴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수업시간에 제주 4/3항쟁이란 사건이 있었다는 것에만 맥락을 했을뿐 구체적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보고서를 통해서 제주4/3항쟁에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서이다.
제주4/3항쟁은 6/25전쟁을 이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었고, 나아가 냉전반공주의를 확산하는 계기를 심어주었다는 데에서 의의를 갖는다.
(2) 냉전 희생의 섬, 제주도
제2차 대전 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냉전 체제가 구축되어 가던 1948년, 한반도의 남 쪽 섬 제주도에는 광란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빨갱이의 섬`으로 낙인찍힌 채 자행된 대량 학살과 인간성 유린은 우리 민족의 최대 참극인 6·25 전쟁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1)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만도 제주 인구의 1/10에 해당하는 3만여 명 이상이었는데 이는 6·25 전쟁 당시 희생당한 남북 한국인의 비율과 거의 비슷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4·3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알 수 있다.
광복 공간에서 `자주적인 통일 국가를 염원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이유로, 그리고 `고립 무원의 섬`이라는 이유로 제주도는 냉전 체제의 희생양이 되어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50여 년 동안 분단이라는 왜곡의 역사 벽에 갇힌 채 4·3은 제주인들의 삶을 억압하여 왔다.
(3) 4·3의 배경
제주 4·3은 한마디로 미군정 아래에서 한민족이 안고 있던 모순이 집약되어 나타난 역사적인 사건…
3·1절 기념 행사가 열렸는데, 시위 후 구경을 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발포, 6명이 숨지고 8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군정 당국은 좌익계의 선동에 의해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려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6명의 사망자가 초등 학생, 젖먹이를 안은 아낙네, 장년의 농부 등 대부분 시위를 보던 군중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제주도민들은 격분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찰의 과잉 반응으로 인한 발포였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4·3의 역사적인 배경을 고찰하는 입장에서 광복 직전의 제주 상황을 살펴보겠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은 제주도민들에게는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으로부터 광복`을 뜻했다. 일제는 제2차 대전 말기에 오키나와까지 점령당하자 제주도를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한 대미 결전의 최후 보루로 삼고 관동군을 비롯한 일본 정예군 7만 명을 이동 배치했다. 소위 결 7호 작전이라고 불리는 이 계획은 미군이 제주에 상륙할 경우 7만 일본군이 한라산을 중심으로 최후까지 유격전을 벌이며 옥쇄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당시 20만 명의 제주도민을 산중으로 끌고가 최후 결전의 소모품으로 사용하려고 했다.
당시 일본군 정보팀은 미군의 제주 상륙 시기를 9∼10월, 상륙 병력을 2∼5개 사단으로 예측했다. 제2차 대전이 한 달만 더 연장되었어도 제주도는 강대국의 전쟁터로 그야 말로 불바다가 될 뻔했다. 그런 위기 속에서 광복을 맞았기에 제주도민의 감회는 본토민들의 그것보다 더욱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발생한 3·1절 발포 사건은 제주도민들을 분노케 하였다. 그러나 군정 당국은 이 발포를 정당 방위라 주장하면서 민심 수습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사건 열흘 뒤인 3월 10일, 분노한 제주도민들은 발포 경관의 처벌, 경찰 수뇌부의 인책 사임, 희생자 유족 보상 등을 요구하면서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민관합동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이 파업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