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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開港)
●조선후기의 상황
조선 후기에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부문에 걸쳐 커다란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그것은 확실히 새로운 시대의 맹아가 나타나 근대사회를 지향하는 움직임이었습니다.
우선 경제적인 면에서는 농업생산력이 급증하여 사회변동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상공업에 있어서도 이미 상업자본의 성장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사회적인 면에서는 부의 축적에 따른 신분의 상승이 일반화되어 양반사회의 신분구조가 붕괴되는 가운데 천민·노비의 해방이 진전되어 갔으며 사상계에 있어서는 새로운 사회변동에 직면하여 유교적인 양반관료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사상체계로서 실학이 발생하여 사회개혁과 근대화의 방향을 제시하였고, 또한 새로이 천주교가 전래되어 전통사회의 질서와 가치규범에 도전하였으며, 민족종교로서 동학이 일어나 농민층을 중심으로 현실개혁의 사회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러한 조선후기의 변화는 근대화를 지향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는 한국사의 내부적인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북학론자들이 통상개화론을 주장하여 개항·개화의 기반을 마련하였던 것이나, 조선 후기에 성장한 상업자본이 근대자본주의 체제의 토대를 이루었던 것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 대원군의 쇄국정책(鎖國政策)
조선에서는 세도정치가 실시되던 19세기에는 서양에서 일찍이 산업혁명을 거쳐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이룩한 열강들이 상품시장과 원료공급지를 확보하기 위해 군함을 앞세워 아시아 여러 나라에 경쟁적으로 침입 해오고 있었습니다. 영국이 아편전쟁에서 승리하여 중국의 문호를 개방시켰고(1842), 이어 애로우호 사건을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가 연합하여 베이징을 점령하였으며(1860), 이를 기화로 러시아는 연해주 일대를 그 영토로 확보하였고 미국도 일본을 위협하여 문호를 개방하는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1854)
전통질서를 재정비하고 조선왕조의 집권체제…
①병인양요(丙寅洋擾)
②신미양요(辛未洋擾)
③강화도조약과 개항-1876년(고종 13)
또한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절되었고 그들에게 즉시 출국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셔먼호는 만경대 한사정까지 올라와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던 중군 이현익 을 붙잡아 감금하였습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평양성 내의 관민은 크게 격분하여 강변으로 몰려들었고 셔먼호에서는 조총과 대완구를 이들 관민에게 마구 쏘아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에 박규수는 철산부사 백낙연 등과 상의하여 화공 및 포격을 가하여 셔먼호를 불태워 격침시켰으며 토머스를 비롯한 전승무원 23명이 소사하거나 익사하였습니다.
당시 대아시아 팽창주의정책을 추진한 미국은 1866년 8월 제너럴셔먼호사건을 계기로 두 차례 탐문항행을 실시하면서 셔먼호사건에 대한 응징과 조선과의 통상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1871년 조선을 침략하였습니다.
③강화도조약과 개항-1876년(고종 13)
이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종래의 전통적이고 봉건적인 통문관계가 파괴되고, 국제법적인 토대 위에서 외교관계가 성립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일본의 강압 아래서 맺어진 최초의 불평등조약이라는 데 특징이 있으며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맞서 개화론자들은 부국강병을 위해서 개화사상을 도입하고 문호를 개방하여 대외통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 하였습니다.
이즈음 조선 조정 내에서의 권력투쟁으로 대원군이 하야하게 되자 이러한 국내의 정황을 탐문한 일본은 1875년 통교교섭을 위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해왔으나 교섭은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측량을 빙자하여 군함 운요호를 조선 근해에 파견하여 부산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의 해로측량과 아울러 함포시위를 벌였습니다.
또한 운요호를 강화도 앞바다에 재차 출동시켜 초지진의 수비병들이 발포하는 사태를 유발하게 하였습니다.
1876년 정한론이 대두되던 일본 정부에서는 전권대신 일행을 조선에 파견하여 운요호의 포격에 대하여 질문함과 아울러 개항을 강요하였습니다.
2월에는 일본 사신 일행이 군함 2척, 운송선(運送船) 3척에 약 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