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한국 사회의 파시즘
(1)한국 사회에서의 파시즘의 발생과 전개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국 파시즘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고 철저한 독재체제를 통한 장기집권으로, 이후 우리나라의 친일파로부터 이어 내려온 우리나라의 소위 보수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며 지금 한국 문화를 만들어나가며 이후 한국 파시스트들의 이념적 기반이자 상징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파시스트들은 박정희를 이렇게 평가한다.
‘박정희는 남북 분단과 주한미군의 존재라는 제약만 없다면 리콴유처럼 서구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우리식 정치이념을 만들고 싶어했던 사람이다. 그가 자주국방을 통해서 대미의존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궁극적 목표도 서구 민주주의에 맞설 수 있는 자주적 정치제도의 창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말하는 우리식 정치이념, 자주적 정치제도란 어쩔 수 없이 파시스트이념, 파시스트 정치제도 일 수 밖에 없다. 관동군 출신으로 군대국가인 만주국을 세우는 것을 보아온 박정희에게 이상국가란 군대의 힘으로 만든 병영국가 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병영국가는 군대적 방식으로 조직되고 운영된다. 이들은 전략과 전쟁의 원리를 국가나 기업경영에 응용하고 군사문화를 국가, 기업, 개인의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활용하여 정치권력의 모델에 따라 군대식으로 조직된 국가 즉, 반민주적 독재국가일 수밖에 없다. 박정희는 국수주의나 독재에 대한 비판적 인식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국민교육헌장…
(2) 한국 사회의 권?언 유착
비정상적 언론의 정상화와 한국언론의 정치적 경향성의 근대적 분화는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비정상적 언론의 정상화가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왜 시민들이 언론의 공정성을 제기하게 됐는가?
이제 언론은 권력의지로부터 해방
.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을 반대·부정·비방하거나 개헌을 주장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고,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하고 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 이었다. 이후 1975년 4월 17일 월남이 공산화 하자 이를 계기로 박정희는 5월 13일 국가 안전과 사회질서 수호를 명분으로 긴급조치9호를 선포하였다. 그것은 일체의 유신헌법에 대한 논의를 금지시켰으며, 일체의 집회시위 및 정치참여를 금지하였다. 1970년대 말에 들어서자 유신 체제의 취약점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1975년 이후의 모든 경제 지표는 급속한 하락 국면을 보여주었고 세계 경제 불황과 1979년의 제 2차 오일쇼크를 덧붙여 한국경제는 기업도산, 인플레이션, 실업의 증가를 야기 하였으며 여기에 ‘YH사건’은 유신 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이끌어 내고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후 김영삼 신민당 총제의 제명에 대한 부산과 마산의 격렬한 시위인 ‘부마항쟁’을 박정권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공수단 병력을 투입하여 시위 군중을 해산하였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 정권은 더욱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었고, 체제 내부의 심각한 분열 현상으로 이어졌으며 마침내 박정희의 피살과 체제의 와해로 이어졌다.
(2) 한국 사회의 권?언 유착
비정상적 언론의 정상화와 한국언론의 정치적 경향성의 근대적 분화는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비정상적 언론의 정상화가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왜 시민들이 언론의 공정성을 제기하게 됐는가?
87년 6월 항쟁 이후 `권력의 자유 민주적 정상화 과정`이 생기면서 민주주의 시대정신이 확산됐다. `민주적 주체화`가 됐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가 동일하게 보도했다고 해도 이를 보는 독자의 시각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즉 언론 수용자 자체가 변했다는 것이다. 또한 <한겨레>, KBS <미디어포커스> 등의 보도가 친권력적 경향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이는 과거 <조선일보>의 행태다.
이제 언론은 권력의지로부터 해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