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그리스 세계》
Ⅰ.폴리스의 성립과 발전
1. 폴리스의 성립
그리스 인은 대체로 기원전 100년경까지 씨족공동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생산은 공동으로 하고 토지경작에서 나온 균등 분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자급자족의 경제형태에 변화가 와서 토지는 추첨에 의해 분배되고, 세습적인 사유지로 되었다. 토지가 사유화되면서 종래의 혈연(血緣)사회가 지연(地緣)사회로 바뀌어 기원전 9~8세기에는 폴리스가 성립하였다. 폴리스는 그리스 본토에 100여 개 있었으며 식민지까지 합해서 폴리스의 총수는 1000을 넘었을 것이다. 이러한 폴리스들은 상호간에 정치적 지배관계가 전혀 없는 자주독립적의 사회였으며 상호간의 정치적 통일성이 없었다.
2. 폴리스의 식민 활동
기원전 8~7세기에 그리스의 식민운동이 활발해지고 아울러 교역도 발달되었는데, 이 양자사이에는 상호관계가 있었다. 그리스의 식민 활동의 이유는 여러 가지로 생각될 수 있다.
1) 영세농의 증가로 새로운 토지에 대한 갈망
2) 사회 안정에 따른 인구증가
3) 도시번영과 시장의 확대
4) 정치적 분규
5) 모험열
그러나 어떠한 이우로 식민지가 수립되었든지 간에, 신설도시는 모국에 대해 정치적인 예속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자주독립의 정치체제를 갖고 있었다. 다만 모국의 제도?관습?종교는 그대로 보존되었으며 문화적?종교적 유대는 유지되었다. 식민운동의 범위는 매우 광범위하여 기원전 600년대까지에는 지중해의 흑해연안에 그리스 식민지가 널리 흩어져 있었으며 오직 페니키아 계통의 카르타고 만이 그리스의 식민운동에 맞설 뿐이었다.
3. 폴리스의 정치적 발전
폴리스는 서로 상이하고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그 정치형태는 특정의 단계적 발전을 거치는 경향이 있었다.…
Ⅱ. 아테네와 스파르타
1. 아테네
. 설사 참주로서의 그의 정치가 폭정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전의 아테네 시민의 자유를 대부분 탄압한 것이었다. 그 뒤 히피아스 추방 등의 혼란과 내분은 귀족출신의 클레이스테네스에 의해 수습되었는데, 그는 평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권을 위임받았다. 혈연적인 행정조직이었던 4부족을 지연적인 10개의 부족으로 재편성하고 각 부족에서부터 50명의 대표를 추첨하여 오백인회(五百人會)를 조직하였다. 또한 클레이스테네스가 창안한 도편추방제(陶片追放制)는 국가에 해를 끼친다고 생각되는 시민을 국외로 10년동안 추방하는 것이었는데, 이 추방제도는 독재자의 출현을 막으려는 원래의 의도가 있었다.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페리클레스 시대에 완성되었다. 10명의 군사위원회가 대체로 행정집회의 최고 책임을 지게 되었다. 군사위원회가 방대한 권한을 행사하였으나. 그들의 정책은 민회의 감사를 받아야 했으며 임기 종료시 혹은 위법행위시에는 고발되었으며 군사위원의 권한은 참주의 경우와 같이 비대하게 되지 않았다. 또한 아테네의 법정제도 역시 페리클레스 시대에 완성되었다.
※ 아테네 민주정의 비근대성 :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대의제가 아닌 직접민주제의 이념에 입각
2. 스파르타
스파르타는 순수한 도리아인들로 구성된 도시국가였으며, 일반적인 그리스의 정치적 발전과정에 있어서 하나의 뚜렷한 예외였다. 아테네에서와 같은 민주제 대신에 스파르타는 현대의 소수자 독재와 흡사한 정치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 스파르타의 사회계급 : (1) 스파르타 시민계급 (2) 페리오이코이 (3) 헤일로타이
스파르타의 문화침체에 대한 가장 주요한 요인은 군국주의에 있었다. 다른 도시국가들이 인구문제를 식민운동에 의해서 해결했던 반면, 스파르타는 무력에 의한 정복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메세니아
스파르타의 정치
- 이원(二元) 왕정(王政)아래 귀족과두정체(貴族寡頭政體)의 내용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