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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테이아
인간이 영상(映像)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랜 옛날의 일로, 일찍이 희랍의 철학자인 플라톤은 <폴리테이아> 속에서 저 유명한 동굴의 비유(比喩)를 말하고 있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불빛에 비친 사물의 그림자를 봄으로써 사물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하기는 눈을 통하여 본다는 인간의 신체구조(身體構造) 자체를 암상자(暗箱子)의 원리에 비교한 생각은 오랫동안 있어 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탈리아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착안했었고, 16세기의 이탈리아의 조각가인 G.B.델라 포르타는 `암상자의 원리`를 처음으로 설명해 냈다. 이러한 생각은 다시 환등(幻燈)의 개념으로 나타나 17세기 이후에는 세계 각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영화가 발명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사진기(寫眞機)와 필름은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간단히 말하면 1757년에 I.B.베커리는 감광막(感光膜)에 대한 광선의 작용을 발견했다. 이때의 감광막은 은(銀)의 염화물이었다.
이후에도 여러 사람의 노력이 있었지만 특히 1802년에 런던의 왕립학회(王立學會)에 제출한 각서에서 웨지우드가 사진술(寫眞術)의 기술과 정의(定義)를 확정지었고, 이어서 죠셉 니세포르 니엡스는 1822년에 아스팔트 감광층(感光層)에 영상을 고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로 피사체(被寫體)를 태양에 노출시키는 긴 시간의 과정이 필요 없게 되는 렌즈가 나타나게 되었고, 감광체로서 젤라틴이 사용되었다. 1884년에 와서 조지 이스트먼이 젤라틴지(紙)의 박리 필름(剝離 film)을 사용했고, 1887년에는 셀룰로이드 필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영화가 발명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세 가지 요소(要素) 즉, 환등기의 개념, 사진기의 발명, 고감도(高感度) 필름 등이 갖추어지기까지에는 이런 장기간에 걸친 준비가 필요했다.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프랑스의 루이 뤼미에르와 오귀스트 뤼…
※ 한국 근/현대 영화의 역사
첫새벽에 걸치는 사이 근대의 과학 속에서 잉태하여 태어났다. 동시에 프랑스·미국·영국·독일 등 각국에서 거의 동시에 태어난 영화는 그 후 불과 4-5년 안에 전 세계의 각지로 퍼지게 되어 영화는 20세기의 예술로서 눈부신 각광을 받기에 이르렀다.
※ 한국 근/현대 영화의 역사
한국 영화의 기점은 1923년 윤백남의 <월하의 맹서>의 발표이다. 한국영화는 그 발아기 자체가 온갖 속박과 검열의 탄압이 심했던 일제하였다. 그러므로 한국영화는 그 당시 세계영화사적인 추세에 비추어 그렇게 활발한 표현수단(예술성이나 문제성에서)의 개혁을 가져올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박해 속에서도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과 같은 금자탑을 이룰 수 있는 영화가 발표되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그 후 한국영화의 암흑기에 몇몇 감독들에 의해서 그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광복과 더불어 감격을 안고 한국영화는 다시 태동을 보려다가 6·25 전쟁으로 인해 제2의 암흑기로 접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1960년대로 접어들며 신상옥, 유현목, 김기영, 이만희 등의 활약으로 전성기를 맞게 되었으며, 이때를 전후하여 영상적인 개념이나 몽타주가 거의 세계영화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고, 문예영화 붐을 맞게 되었다.
그런데 다시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부터 한국영화는 불황과 더불어 침체상태에 빠져 들게 되었다. 여기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겠으나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그 간에 누적되어온 온갖 형태의 병폐가 만성 고질화되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시대착오적인 기획, 수지타산만 따지는 얄팍한 상혼, 국적불명의 시나리오, 예술인으로서 긍지와 양식 따위는 아랑곳없는 겹치기 배우와 감독들, 이 모든 병폐가 관객으로 하여금 한국영화에 대한 불신풍조를 갖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