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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高句麗] 이야기
☞ 고구려, 어떻게 건국되었는가.
흔히들 고구려의 건국 하면, 해모수와 유화의 자제로 태어난 ‘고주몽’의 건국 신화를 들어봤을 것이다. 여기서도 건국신화를 배경으로 역사 자료를 참고하여 고구려는 어떻게 건국되었는가에 대해 알아보겠다.
고구려 건국의 시조는 ‘고주몽성제’이며 ‘열국시대’의 한 나라였던 북부여의 여섯 번째 단군인 고무서 단군의 딸인 ‘소서노’와 결혼하였다.
옛 고구려의 수도인 집안시에는 그 유명한 광개토대왕릉비가 자리 잡고 있다. 그 비문의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의 터전을 잡을 때 북부여로부터 나왔는데,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내려왔으니 태어나면서부터 신성함이 있었다. 수레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었다. 왕이 나루에 다다라 말하기를 ”나는 황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딸인 유화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시키고 자라를 떠오르게 하라“고 하였더니,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자라가 떠돌라 건너갈 수 있었다. 비류곡 홀본(졸본) 서쪽 산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인간세상의 왕위에 있는 것을 즐기지 않으니 이로 말미암아 (하늘이) 황룡을 내려보내어 왕을 맞이하게 되니 홀본의 동쪽 언덕에서 황룡을 타고 올라갔다.”
비문에서 보듯이 고구려 사람들은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과 자신들이 북부여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다. 즉, 자신들은 남만주 지역에서 오래 전에 정착하여 발전해 온 것이 아닌 이주민이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주도세력 또한 부여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부여가 고구려보다 북쪽이라는 것을 볼 때 고구려의 주민 구성은 북방에서 말을 타던 무리들이 내려와 압록강 유역에 정착하면서 살던 사람들과 융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추모왕은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동가강 유역의 토…
방군을 병합하여 한반도 내에서의 중국 군현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비옥한 농경지대인 이 지역의 확보는 고구려의 국가 발전에 중요한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이어 고구려는 요동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선비족의 모용씨가 세운 전연과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두차례의 전연의 침입을 받아, 342년(고국원왕 12)에는 수도가 함락되는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요동 진출이 수월하지 않자 고구려는 남쪽으로 정복활동의 방향을 돌렸으나, 새롭게 성장하는 백제와 대결하면서 371년에는 백제의 침공으로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대 타격을 입기도 하였다.
미천왕 이후의 대외 팽창이 서와 남에서 좌절되고 오히려 커다란 국가적 위기에 처하게 되자, 고구려는 국가체제의 정비와 새로운 지배질서의 구축을 위한 일련의 개혁을 추구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소수림왕 때의 율령 반포·태학 설립·불교 수용이다. 불교의 공인은 보편적인 정신세계의 통일을 위한 노력이며, 율령의 반포는 일원적인 지배질서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제도적 개혁이었다. 또 태학의 설립은 관료체제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보다 안정되고 강력한 집권적 지배체제를 세울 수 있었다. 다음 단계의 광개토왕·장수왕 대의 비약적인 고구려의 발전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 가능하였던 것이다.
<광개토왕비>와 <중원고구려비>에서 고구려는 스스로 천하의 중심임을 자부하였다. 더욱이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중국이 남북조로 나뉘어 대립하고, 북방에서는 유목 국가인 유연이 세력을 떨치며, 여기에 고구려가 하나의 세력권을 형성하는 다원적인 세력 균형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고구려는 남북조나 유연과 다각도의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독자적인 새력권을 유지하며 발전할 수 있었다.
아울러 이러한 대외관계에 힘입어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물론 중앙아시아 지역과도 교류함으로써 문화적으로도 다양한 제반 문물의 수용 속에서 독자적이면서도 국제성이 풍부한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