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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파 시인 유치환
1. 들어가며
경남 충무시 태평동에서 유생인 준수의 8남매중 2남으로 1908년 출생한 유치환은, 11세 때까지 사숙에서 한문을 공부, 그 후 통영보통학교 4년을 마치고 도일하여 토쿄 토요야마 중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가운이 기울어 귀국, 1926년 동래고등학교 5년에 편입. 그 이듬해 졸업하고 연희전문문과에 입학했으나, 폐쇠적인 분위게에 불만, 1년만에 중퇴했다.
2. 유치환의 작품활동
1929년 시단을 풍미하던 정지용의 시에 감동, 가형과 함께 고향에서 동인지 <생리(生理)>를 발간, 1931년 <문예월간>제 2호에 시 <정적>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이후 사진관 경영, 백화점 사원, 학교 교사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시작에 전념, 1939년 12월에 첫 시집 <청마시초>를 간행했다.
이 시집에는 초기의 대표작인 <깃발> <그리움> <일월>등 5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1940년 봄, 만주 하로빈 근교로 이주하여 농장을 관리했는데 , 제2시집 <생명의 시>에 수록된 가열한 시편들은 모두 이 만주에서의 체험에 의해 씌여진 것들이다. 1945년 10월 고향 통영으로 돌아와서 여중 교사가 되었다.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제 1회 시인상을 수상, 1947년 5월 , 그 동안에 쓴 시 <바위> <광야에 와서> <드디어 알리라> <수(首)>등 59편을 모아 <생명의 시>를 발간했다. 1948년 9월 제3시집 <울릉도>를 발간했다. 1949년 5월 제 4시집 <청령일기>를 계속 펴내고, 1950년 6.25 동란이 일어나자 육군 제3사단에 종군하였다.
이해에 제2회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51년 9월에는 직접 목격한 민족상잔의 비극을 종군시집 <보병과 더불어>로 엮고, 1953년 고행으로 돌아가 수상록 <예루살램의 닭>을…
3. 생명파 유치환 시의 특징
적인 굴절을 겪지 않고 명확하게 직접적으로 이야기된 것’ 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시인인 것을 별로 달가와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부정하려고 시도한 일 조차 있었다. ‘또한 염의도 없는 분뇨를 하듯 어찌 시인이 시를 낳으려고 애를 써야 하겠습니까. 참아서 능히 견딜 만하거든 아예 붓대를 들지 아니하는 것이 시인으로서의 불행을 하나라도 덜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나는 시인이 아닙니다<<생명의 시> 서문> ’ 이와 같이 그는 자신이 시인임을 적오도 시를 작위적으로 낳으려는 시인임을 부정했으나 그가 살아야 했던 시대는 수많은 시련을 그에게 안겨주어 마침내 한국 최대의 다작시인의 자리에 그를 올려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