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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 소련의 경제계획 전반의 연구
1. 국가 경제계획 실시 가능성에 대한 의문
경제계획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결론은 명백한 것은 아니었다. 소련에서도 1917년부터 1921년까지의 러시아 혁명후 바로 이어지는 몇 년 간은, 새로운 소비에트국가의 경제는 삐거덕거리다가 점차로 멈춰 버릴 것처럼 보였다. 혁명, 반혁명 및 전쟁으로 인해, 옛날 동구에서의 전후 강화처리의 결과 외국에 빼앗기지 않고 남아 있었던 그나마의 산업시설도 대부분 파괴되었다. 새로운 정부는 공장들을 관리할 채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이전의 주인들도 자신들을 절멸시키기 위해 열중하는 체제 속에서 공장을 운영하리라고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다.
농민들은 대규모 농장을 장악하고는 이전보다 감소된 농업생산물을 시장에 내다팔아 도시로 공급하는 대신 그 대부분을 소비해 버렸다. 식량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부가 군대를 파견하면 농민반란의 위협이 따랐다. 그리고 구관료체제가 붕괴되어 조세수납에 실패하게 되자 정부는 화폐를 조달하기 위하여 지폐를 남발하였다. 그 결과 물가는 폭등하여 이미 발생된 경제적 혼란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2. 소련의 신경제정책
비상대책이 요청되었다. 정부는 결국 상공업의 완전한 국유화로부터 후퇴하여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 : NEP)으로 전환하였다. 경공업과 소매업은 사기업이 다시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경제의 “관제고지”(commanding heights), 즉 중공업, 전력, 수송, 은행 및 대부분의 도매업을 계속 장악하였다. 이러한 조치로 경제는 원활한 반응을 보였다. 1928년에 이르러 대부분의 산업에서 산출고는 …
3. 레닌의 노선
한 잉여농업생산량에 의해서 규정된다고 주장하였다. 공업은 성장해야만 했다.
그러나 공업의 두 가지 주요 임무는, 농민들로 하여금 농산물을 시장에 출하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농민들에게 판매할 농기계 및 소비재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부하린은 정부에 대한 농민층의 충성심에 관심을 기울였다. - 그리고 그것은 옳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농민들의 자발적인 농업생산 증가에 의해서 뒷받침 될 수 있는 수준 정도로 공업발전을 기꺼이 제한하고자 했다. 이러한 정책은 공업과 농업간, 중공업과 소비재간의 관계와 같은 기본적인 경제 관계가 가능한 경제성장률의 한계를 결정하며 계획당국이 이러한 제관계속에 내재하는 속도를 넘어서 경제를 성장시키는 것은 위험하다는 신념에 입각한 것이었다. 부하린 역시 정책을 대외관계와 연결시키고 있었다. 그는 최초의 시도가 성공하지 못했으므로 세계혁명은 잠정적으로 연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군다나 신정부는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국내에 확고한 지지기반을 구축해야만 했다. 이것은 농민들을 지나치게 압박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충성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두 번째 접근방법은 온건파의 노선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공산당의 “좌익”(left wing)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이 그룹의 대표자는 혁명기간 중 레닌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였다. 그리고 이 분파의 수석경제학자는 프레오브라젠스키(Evgeni Preobrazhensky)였는데 그는 부하린과 더불어 위에서 말한 1920년의 논문을 썼지만 지금은 반대되는 입장에 섰다. 이 그룹이 제안한 개발전략은 경제를 최고한도까지 밀어붙이고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가능한 한 최대의 공업화율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그 방법은 자원을 공업육성 쪽으로 돌리기 위해 생활 수준을 압박하는 것, 그리고 국가권력을 사용하여 식량, 원재료 및 수출품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농업부문에서 최대한의 잉여를 뽑아내는 것이었다. 좌익은 심지어 경제혼란이라는 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