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불트만의 역사관과 신학
1. 볼트만의 역사관
불트만의 역사관은 신앙과 역사를 단절시켜 놓는다. 기독교는 그가 보기에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보다는 "현재 신자들의 경험속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이천 년 전에 역사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는 그리 중요한 것이 못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오늘날 그것이 신자들에게 주는 의미이다. "역사의 의미는 언제나 현재에 있고, 현재가 신자들에 의해 종말론적인 현재로 느껴질 때 역사에 있어서 의미는 실현된다"(Braaten,P 133).
불트만은 역사적 관념론자들에게 "해석자는 본래의 창조적인 순간을 재경험해서 생명 있는 표현을 해야하는 것"을 배웠다.(Ibid.). 그에게는 "역사적 지식의 객관성은 완전 궁극적 지식의 의미로는 얻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사고의 객관화는 자연 과학에서나 통용되지 역사에서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지식은 오로지 "깨닫는 주체의 아주 개인적인 생명력"에 의존하게 된다 (Bultmann,History Eschatology Bros,1957,P.121).
그는 콜링우드의 가르침 에 역사가의 실존적인 참여를 더한다. 역사가는 "미래를 향한 자신의 책임을 깨 달음으로 역사적 현상에 자신을 열어 놓는다"고 주장한다.
2. 볼트만의 역사와 신앙 분리의 이유
또한 "이런 의미에서 가장 주관적인 역사 해석인 동시에 가장 객관적인것"이 되는 것이다.(Ibid,P 122). 이러한 불트만의 역사와 신앙의 분리는 세 가지의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의 주된 관심을 20세기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소개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초자연 을 믿지 낳을 것이다. 예수가 물 위로 걸어갔다면 귀신을 쫓아내었다든지 죽은 뒤에 육체로 다시…
3. 볼프만의 역사관에 대한 비판
없기 때문이다.(Jesus X Mythology,Scribner,1958,P.71).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내게 개인적으로 들려주는 말씀이 된다. 그것은 실존 일반에 대해서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참된 실존을 준다."(Ibid,P.53)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설교를 읽고 독자들은 신앙과 불신앙 그리 고 본래적인 삶과 비본래적인 삶 중에 한쪽을 선택해야 할 입장이 된다.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 사건의 진실성을 믿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의 것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는 새 삶을 경험하기 위해서 죽음을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 포기에 결심에 의해서 얻어지는 삶의 새 형태이다. 물론 불트만의 신앙의 견해에는 어떠한 초자연적인 가치도 포함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참된 인간 본성의 완성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참된 인간의 본성이 신활로 가득찬 기독교인들의 성경에서만 발견되겠는가? 그가 신앙의 근거로서 의 객관적인 지식을 거절하는 것은 그가 다룬 사복음서에 잘 타나나 있다.
불트만은 요한이 "단지 계시의 사실 (das Dass)을 그것의 내용 (ihr Was)을 기술함이 없이 그리고 있다."(Theloogy of the New Testament,2:66)고 했다. 여기서 불트만이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계시가 아무런 내용도 사실상 없다는 것 이 아니다. 같은 방법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설명하면서 불트만은 "계시란 생명과 참 실존에 대한 인간의 갈망의 확증과 성취"(Ibid.,P.68) 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세속 철학적인 개염으로 해석된 신앙의 설명을 보노라면 이런 종류의 신앙을 위해 기독교의 계시가 꼭 필요한 것인지 의문을 일으키게 된다. 그 의문의 직접적인 답은 매우 모호한 것이지만 그의 전체 작품들을 통해 볼 때 그 대답은 너무나 분명하다고 볼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