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엘리자베스 빈민법에 대하여
목차
* 엘리자베스 빈민법
Ⅰ. 14~16세기 빈민법
Ⅱ. 엘리자베스 빈민법
* 참고문헌
* 엘리자베스 빈민법
1. 14-16세기 빈민법
1348-1349년에 발생한 흑사병(중국에서 발생하여 교역로를 따라 유럽으로 전파된
것으로 추측)은 중세를 통틀어 민중이 겪은 최대의 파국이었다. 1348년 8월 이후
불과 수개월 만에 전 인구의 30-45%가 사망했다고 한다.
흑사병에 의한 대규모 사망 사태는 역설적으로 살아남은 자들의 처지를 개선
시켰다. 흑사병이 휩쓸기 직전 영국은 과잉 노동력 상태였는데, 흑사병으로 노동
력 부족 사태가 발생하여 근로 빈민들의 임금을 상승시켰다. 예를 들어, 14세기
중엽에서 15세기 중엽 사이 탈곡이나 키질 등 농업 노동의 임금이 50-75% 정도
상승하였다(해리슨, 1989 : 63).
지주들의 입장에서는 이제 임금통제가 불가피해졌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1351년 노동자규제법(the Statute of Labourers)이 제정되었다. 이 법의 골자는 걸식과 부랑을 금지하고, 임금 억제를 위해 임금에 상한선을 두며, 지주 상호간의 농
민 쟁탈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이 법은 장원 영주와 도시의 부유한 상인들의 이
익을 일방적으로 대변해 준 악법으로서 도시 및 농촌에서의 노동생활의 제 조건
에 대해 봉건적 규제를 가한 장구한 노동입법의 출발이었다. 노동자규제법은
1388년의 빈민법(the Poor Law Act)으로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 빈민법 제정의 목적은 (1) 임금을 고정화시키고, (2) 임금 상승을 야기하는 노동력의 이동을 금지하는데 있었다(Fraser, 1984 : 28).
이렇게 농업 노동임금…
것이었다. 또 구빈의 책임을 교구에게 부여했으되 그 책임은 어디
까지나 도덕적민 것이었으며, 오늘날과 같은 사회적민 것이 아니었다(George,
1973 :4). 빈곤은 부랑자의 대규모 도시 유입의 문제로 간주되었고, 빈민은 기존
의 사회질서에 대한 위험집단으로 취급되었으며, 유랑자나 건달 등으로 낙인찍
혔으며, 현대 용어로 실업자인 노동능력이 있는 빈민, 부랑자, 범죄자에 대한 처
우는 여전히 가혹하였다.
1536년에는 신체 건강하면서 나태한 부랑자를 처벌하기 위해 또다시 건장한
부랑자 ? 걸인 처벌법(the Act for Punishment of Sturdy Vagabonds and Beggars)이 제정되었는데, 빈민구제에 필요한 기금과 물품은 자선이나 시여의 방법을 통해 조달하고, 이를 공적으로 처리하되 이를 어길 시 벌금을 부과하며, 치안판사와 시장은 미성년 걸인(5-13세)을 도제로 보내고 이를 거부할 시에는 매질을 가하고, 부랑자가 두 번 잡히면 매질과 함께 귀를 자르고 세 번 잡히면 사형에 처한다는 게
법의 골자였다.
그리고 1547년 헨리 8세의 사망 이후 의회는 부랑자를 처벌하기 위해 그들을
농노로 만드는 법(the Act for the Punishment for the Vagabonds and for the Relief of the Poor and the Impotent Persons)을 제정하기도 하였다(Fraser, 1984 : 31-32).
이 법은 가혹한 법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 노동능력이 있는 자가 3일 이상 노동을 거부하면 뜨거운 인두로 가승에 v자 낙인을 찍어 노예로 삼도록 했으며, 도망치면 이마에 S자 낙인을 찍고 평생토록 노예가 되도록 만들었다.
1576년에는 빈민을 강제로 일을 시키는 법이 제정되었다(이런 관념은 그 후3세
기 반 동안 유지된다). 즉, 노동능력자는 작업장(workhouse)에 보내어 일을 강제로
시키고, 노동무능력자는 자선원(charitable hospitals)에 입소시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