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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의 등장-퍼스널 사회서비스와 가족수당
* 퍼스널 사회서비스와 가족수당
퍼스널 사회서비스(Personal social services)에 대한 노동당 정부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당시만 해도 이 부문의 중요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며, 정치적인 쟁점으로 등장한 적도 없었다. 1940년대의 퍼스널 사회서비스는 정치적 무관심 속에서 약간의 개선만 이루어졌다.
1948년의 아동법(the Children Act)은 한 아동 살인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제정되었다. 1945년 데니스 오닐이란 아동이 양아버지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이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아동문제에 관한 교육당국과 공공부조 간의 책임 소
계가 불분명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를 계기로 정부는 학대받고 박탈당한 아
동을 위한 서비스에 대해 광범위하게 조사하였다. 그 결과 지방정부 단체장과 전
문가로 구성된 아동위원회(the Children Committee)를 설치하여 아동학대 문제를 조사하고 지방정부로 하여금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한 아
동법이 제정되었다(Hill, 1993 : 38-39).
그리고 전술한 대로 NHS법에 따라 지역사회보건서비스의 책임을 지방정부에
부여하자 일부 지방정부에서는 보건과 사회복지 간의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감안
하여 보건복지과(health and welfare departments)를 두기도 했다. 아동법과 지역사회 보건서비스는 훈련된 전문직, 즉 사회사업가의 역할을 필요로 했다. 특히 아동과(children departments)의 직원으로 충원된 사회사업가들은 원래 업무인 아동보호뿐만 아니라 예방적 활동이라는 새로…
1945년에는 첫 자녀를 제외한 16세 이하의 모든 자녀들에게 주당 5실링씩의
적하였다(Jones, 1991 : 136).
. 노동당 정부
는 이를 가장 우려하였다. 그러나 대장성과 미국 간의 협상이 원만히 이루어져
미국으로부터 추가 대출까지도 받을 수 있었다(마샬 플랜). 그리고 국민 담세율은
매우 높았던 반면, 종전 후 국방비 지출이 꾸준히 감소했다. 노동당 정부는 소득
세을만 약간 낮추었을 뿐 조세 부담을 축소시키지 않았으며, 평화의 도래로 국방
비 지출이 크게 감소하였다(1945년 44억 파운드에 달했던 국방비가 1947년에는 8억 5천만 파운드로 감소). 이로써 노동당 정부는 대외 부채의 부담으로부터 벗어나면서 복지에 소요되는 재정을 마련할 수 있었다. 평화가 사회복지의 확대를 가능하
게 한 것이다.
애틀리 정부의 복지국가는 사회적 혁명의 성취는 아니었다. 그것은 기존 사회
복지제도의 확대와 수정이었다. 그럼에도 복지국가를 단지 기존의 사회보장제도
를 행정적으로 묶어 낼 것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노동당 정부가 복지국가를 창조
할 무렵 국내 ?외의 정황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그렇다. 실용주의적인 관점에
서 보면 복지국가는 전후 상황 속에서 노동당 정부가 일구어 낸 성과물이다. 여
하튼 노동당 정부는 전후의 각종 제약 속에서 복지국가를 건설함으로써 대국민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전후 복지국가의 성립으로 오랫동안 영국의 노동운동이
추구해 왔던 개혁이 사실상 거의 다 달성되었다(Hess, 1981 : 310-311).
노동당 정치인 크로슬랜드(C. A. R Crosland)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대영제국은
쇠퇴하고 영국의 국제무대에서의 역할은 축소되었지만 `사회정치(social politics)`
는 번성하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Glennerster, 1990 : 15). 사회복지정책은 이제 정치의 주요 주제가 되었으며, 1960년대 초까지 두 당은 복지국가의 수용이라는 큰 틀에는 대체로 합의하였다.
이른바 합의의 시대(the era of consensus)가 도래한 것이다.
*참고문헌
- 원석조(2005). ‘사회복지정책론’. 공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