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신빈민법] 19세기 초의 사회-경제적 상황, 자유주의, 왕립빈민법위원회
목차
* 신빈민법
Ⅰ. 19세기 초의 사회 · 경제적 상황
Ⅱ. 자유주의
Ⅲ. 왕립빈민법위원회
* 참고문헌
* 신빈민법
1. 19세기 초의 사회 ? 경제적 상황
나폴레옹 전쟁(1793년 제1차 대불동맹전쟁에서 1815년 워털루 결전까지) 후의 불
황기에 영국은 심각한 노동문제에 직면하였다. 전후 불황기는 19세기를 통틀어
실질임금이 가장 저하되었던 시기였으며, 실업도 일책이 없었던 규모에 이르렀
다. 따라서 기계파괴 운동(러다이트 운동), 농민 폭동, 노동자 폭동 등이 빈발하였
다. 전술한 전반적 단결금지법에 의해 비합법화되어 있던 노동조합의 잠행활동
이 활성화되고 불황으로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은 소생산자충의 폭력적 반항운
동과 연계되면서 선거법 개정운동, 즉 차티스트 운동으로 고양되어 갔다. 이에
대해 리버풀 내각은 대장성 증권의 발행으로 공공사업을 일으켜 실업자를 고음
하는 등의 구제책을 강구했지만, 전시에 발행된 국채의 잔고가 무려 8억 파운드
에 달해 그 이자로 인한 계정 경직화 때문에 실업구제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할
수 없이 정부는 1817년의 인신보호정지법(the Habeas Corpus Suspension Act), 1819년의 육법(the Six Acts) 및 피털루 대학살(the Peterloo Massacre) 등의 탈압정책으로 노동운동에 대응하였다.
1820, 30년대 들어 노동운동은 더욱 고양되었다. 1825년의 공황과 뒤이은 불황
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자본가 계급은 새로운 생산방법의 도입(기술혁신)과 투
하 자본량의 증대 등의 조치를 취했고 그…
지
괄
목할 만했다. 최초로 인구센서스가 있었던 1801년,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인구는
889만 명이었다. 그것이 1851년에 와서 배 이상인 1,793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Jones, 1991 : 3-4).
산업화로 빈곤의 성격이 바뀌었으며(농촌의 부랑자에서 도시의 실업자로), 전통
적인 방법으로 새로운 빈곤현상을 해결할 수가 없게 되었다. 절박한 처지에 빠진
빈민들은 정주법을 무시하고 일자리를 찾아 이동하였다. 빅토리아 여왕이 13살
때인 1832년 미드랜즈를 여행하며 빈민들의 생활처지를 보고 놀라, "남자고 여자
고 지역이고 집이고 간에 모두 시커멓다"라고 말했다. 당시 도시 빈민들은 헛간
이나 지하실에서 살았으며, 공장의 시커먼 연기, 불결, 기아, 질병, 절망과 함께
새로운 공장제도로부터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젊어 사망했다
(Jones, 1991 : 4-5).
스핀엄랜드법, 작업장법, 길버트법 등 여러 새로운 방책들이 마련된 바 있다. 그리고 19세기 초 영국인들은 프랑스와의 장기간 전쟁으로 빈민구제의 비용이 증가하는 것을 수용하였다(Fraser, 1984 : 37).
그러나 상황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빈민의 수와 빈민구제의 비용이 계속해서 증가했으며, 장기간의 억압으로 빈민들의 좌절과 분노는 커져만 갔다. 개혁은 불가피했다(Tones, 1991 : 7).
1830년, 46년 만에 휘그당은 정권을 잡았다. 휘그정부는 1832년 선거개혁법
(the Reform Act)을 제정하여 지주계급의 정치적 특권의 온상인 부패 선거구를 페
지하였으며, 소규모 재산 소유자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하였다. 새로 선거권을 획
득한 이들 소규모 계산 소유자들은 휘그정부의 개혁을 지지하였다. "` 1832-1834
년 휘그정부는 공장법 개혁, 감옥 개혁, 농노제 폐지, 지방정부의 개혁 등 일련의
계몽적인 조치와 함께 빈민법도 개정하게 된다.
그러나 휘그정부는 신흥계급인 부르주아지와 노동자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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