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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사건 조사 개요
노근리 사건 조사반은 지난 1년여의 조사과정을 통해 노근리 사건에 대한 최종적인 조사결과 보고서를 발표하게 된 것을 뜻깊게 생각한다. 한?미 양국 조사반은 1960년대부터 양국 정부에 13차례에 걸쳐 노근리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제기해 온 피해주민들의 오랜 기간동안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고, 노근리 사건과 관련된 의혹과 불신이 지속될 경우 한?미 양국의 지속적인 유대?협력과 미래지향적 동반자 관계가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기 위한 혼신의 노력을 경주해 왔다. 금번 보고서가 노근리 사건의 진상을 100% 밝혔다고 볼 수는 없겠으나, 조사반은 주어진 여건 내에서 노근리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피해자와 참전장병 증언, 각종 문헌자료, 사건 현장 조사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최대한 동원하였다.
양국 조사반은 한?미 양국 간의 상이한 법체계와 사생활 보호 문제, 문화적 차이 등 조사와 관련된 제반 여건상의 제약으로 인해 완벽한 사실 규명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각각의 조사결과가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그리고 진실을 향해 접근할 수 있도록 상호 긴밀한 협의와 협조를 지속하였다. 그 결과, 한측 조사반은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미측 증언자들의 증언록을 미측 조사반으로부터 인도 받아 조사에 임할 수 있었으며, 관행상 상주 열람이 제한되는 미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에 1명의 인원을 일정 기간 상주시켜 방대한 관련 자료들을 자유로이 열람할 수 있었다. 한국 조사반 역시 자체 노력에 의해 확보된 자료들을 미측과 공유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였다. 금번에 발표되는 이 보고서는 이러한 양측 조사반의 공동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 사건 조사 배경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1개월 후인 1950년 7월 25일부터 7월 29일 사…
가. 피해주민 주장
같다.
1950년 7월 23일 정오경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에 미군 장교 1명과 한국 경찰관 1명이 탄 찝차 1대가 들어와 “이곳이 전쟁터가 될 위험이 있으니 오늘 중으로 마을을 비우라”고 마을 골목을 다니면서 알렸고, 이에 따라 주민 대부분은 남쪽으로 2 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산간마을 임계리로 피난하였다. 일부는 보다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기도 했다.
7월 25일 해질 무렵 임계리에 일정한 규모의 미군이 들어와 임계리 마을 주민과 이곳에 피난 와있던 주곡리 마을 주민 및 기타 피난민 500~600명에게 대구 방면으로 피난시켜 준다고 하면서 도보로 인솔하여 그곳을 떠났다.
임계리를 떠난 피난민들이 약 3.5 킬로미터 가량 행진하여 영동읍 하가리에 도착했을 때 미군들은 피난민들을 하천변에 집결시키고 강력히 통제하며 밤을 새도록 하였다.
하가리에서 밤을 지내고 아침에 일어나 보았을 때 미군들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자 피난민들은 하가리를 떠나 대구 방면으로 피난길을 계속하였다. 하가리로부터 7~8 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마을 가까이 갔을 때 미군들이 다시 나타나서 피난민 모두를 철도 위로 올라가게 하였다.
철도 위에서 미군은 소지품 전부를 검사하였으나 위해를 가할 만한 물건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소지품 검사가 끝날 무렵 미군 통신병이 무전으로 어디론가 연락을 취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얼마 후 남쪽에서 비행기가 날아와서 피난민 쪽으로 접근하자 미군들은 모두 멀리 도망쳐 달아났다. 곧이어 비행기는 피난민들의 머리 위에 폭탄을 떨어뜨렸고 기총공격까지 함으로써 이곳에서 상당한 수의 피난민들이 희생당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철로변의 아카시아 나무 숲속과 철로 밑에 만들어진 작은 도수로, 그리고 노근리 앞 철로 밑에 만들어진 두 개의 수로로 숨었다.
미군들은 얼마 후 아카시아 나무 숲과 도수로에 숨어있던 사람들을 끌어내어 큰 터널(통상 쌍굴이라 불림)속에 집결시킨 다음 터널 양쪽 입구에서 멀리 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