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성체강복에 대한 고찰
1. 들어가는 말
성체강복은 통상 성체현시(Expositio Eucharisticae), 성체조배(Adoratio Eucharisticae)와 병행하여 거행되며 성체거동과 함께 성체공경 신심의 대표적인 것이며 또한 대표적인 서방교회의 고유전례라고 할 수 있다.
2. 성체공경의 역사
성체에 대한 흠숭과 존경의 표시은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있어왔다. 성찬례에 참석한 신자들은 성체를 집으로 모셔가기도 했고 또 노자성체를 위해 정성껏 보관하기도 하였다(유스띠노 호교론 1,67; 히뽈리또 사도전승 32). 초대 교회이래로 성찬례 밖으로 성체를 모셔갈 때 무릎을 꿇거나 부복을 하기도 하였고 이러한 공경의 형식은 오늘날 비잔틴 전례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신자들의 조배를 위해 성체를 일정한 장소에 현시하거나 성체께 올리는 특별한 예식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성체는 눈에 띄지 않는 견고한 장소에 보관되었다. 그리스도교 초창기의 교회 건물은 신자들이 일정한 시간에 예배를 위해 모이는 단순한 용도로 이용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적으로 신자들이 자유로운 시간에 기도하러 오는 장소가 되었고 특히 수도원의 부흥과 더물어 성당은 기도하는 장소가 되었으나 아직 성당의 중심은 제대였고 감실은 성체보존을 위한 단순한 장소로 여겨졌다.
중세를 거치면서 성체안의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고 성체의 신비에 대한 새로운 신심이 발흥하면서 성체공경에 대한 신앙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신심(Devotio Moderna)은 직접적으로는 전례의 쇠태에 의해 기인된 것이었다. 서방교회에서의 전례의 쇠태는 전례가 라틴어를 고집하여 신자들이 전례언어를 알…
3. 현행 성체강복 예식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체공경과 같은 신심행사가 전례와 조화를 이루고 신자들을 전례에로 인도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선언하였고(전례헌장 13항) 성체신심에 관
성녀 도로테아의 삶에 관한 1394년의 기록을 보면 매일 아침 성당에 가서 성광에 모셔져 있는 성체를 바라보며 기도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보아 이러한 성체현시의 관습은 연중 다른 날에로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태리와 프랑스 지방에서는 예수가 무덤속에 계셨던 시간을 상징하여 40시간의 성체조배가 유행하였고 이러한 성체현시와 조배는 16세기에 이르러 성체강복으로 끝을 맺게 되었는데 1600년의 교황 클레멘스8세의 예식서(Ceremoniale episcoporum)는 성체축일날 성체거동 후에 Tantum ergo를 부르고 천상양식(Panem de caelo) 후렴 뒤에 강복 기도문(Deus qui nobis)을 바치며 이어서 성광을 들어 강복을 하는 전통형식이 확정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트렌토 공의회 이후 종교개혁자들이 성체의 실체변화에 대해 반대함으로써 가톨릭교회의 성체신심은 한층 강화되었고 그리스도 현존의 상징이 되는 감실은 더욱 화려하게 장중하게 치장되었으며 성당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감실이 세워지게 되었다. 반 개혁운동이 강했던 이탈리아 밀라노의 경우 교구 내 성당들이 돌아 가면서 한 시간씩 성체를 현시하기도 하였다. 이후 바로크 시대를 중심으로 성체 신심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체공경이 활발하게 펼쳐졌고 이와같은 성체신심은 19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성체신심의 지나친 발전은 오히려 영성체를 소홀히하고 미사의 공동체성과 미사 안에서 실현되는 그리스도의 파스카 제사에 관한 신비신앙을 저하시키는 등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지나치게 남용되는 듯한 경향을 띄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급기야 20세기 전례운동을 통해서 다른 신심행위들과 함께 진지하게 고려되기 시작하였고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교회는 이에 대한 새로운 지침을 발표하게 된다.
3. 현행 성체강복 예식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체공경과 같은 신심행사가 전례와 조화를 이루고 신자들을 전례에로 인도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선언하였고(전례헌장 13항) 성체신심에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