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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洋開拓의 先驅者 新羅 將軍 異斯夫
머 리 말
21세기는 해양진출의 시대이며 바다는 21세기 인류의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될 것이라 한다. 다시 말해서 바다를 지배하는 국가가 21세기를 이끌어 가는 중심국가가 될 것은 자명한 일이라 하겠다. 이러한 시기에 오랜 옛날에 바다를 호령했던 위인들의 활약상을 살펴보는 것도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새로운 개척 정신을 일깨워 주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 믿는다.
그 중의 한 인물로서 新羅 智證王 때 지금의 울릉도인 于山國을 정벌하였던 新羅 將軍 異斯夫와 그의 울릉도 정벌에 관하여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해양개척 정신을 일깨워 주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 여겨진다.
異斯夫의 행적
“新羅將軍 異斯夫 지하에서 웃는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랫말로 우리에게 친근한 異斯夫는 『三國史記』 新羅 本紀와 列傳의 기록에 의하면 新羅 奈勿王의 4세손으로, 高句麗?百濟보다 후진적이었던 新羅가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던 智證王, 法興王, 眞興王 3대에 걸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정치, 군사, 학문 등 다방면에 걸쳐서 크게 활약한 정치가요 군사전략가요 학자이다. 『三國史記』 智證王 6년(505)조에 보면 “봄 2월에 왕이 친히 나라 안의 州?郡?縣을 정하고 悉直州(지금의 三陟)를 두어 異斯夫로서 軍主를 삼았는데 軍主의 이름은 이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異斯夫가 강원도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편 列傳에 의하면 “.....(前略)..... 智度路王(智證王)때에 연해변의 관리가 되었다. 그는 居道가 마련한 馬叔놀이〔列傳 異斯夫傳 바로 앞에 실려 있는 居道傳에 보면 이 놀이로 군사를 훈련하여 于尸山國(지금의 蔚山)과 居柒山國(지금의 東萊)을 멸망시켰다고 하…
하였으니 당시의 兵部令은 兵部의 책임자로 兵權 뿐만 아니라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의 요직이었다. 이어서 眞興王 6년(545)에는 “왕에게 『國史』의 편찬을 상주하니 왕이 진정으로 그렇게 여겨 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문사들을 모아 그들에게 國史를 편찬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이어서 眞興王 11년(550)에는 “百濟가 高句麗의 道薩城(지금의 天安)을 함락시키자 高句麗는 百濟의 金峴城(지금의 충남 全義)을 함락시켰다. 이에 왕은 두 나라의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서 異斯夫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이를 무찌르게 하고 두 성을 빼앗아 더 늘려 쌓아 군사 1천을 머물러 두고 이를 지키게 하였다.”고 하였다.
한편 異斯夫가 등장하는 金石文 기록으로는 1978년 정월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하여 남한강 연안의 丹陽 지방에서 발견된 丹陽赤城新羅碑에 나타나고 있는데 비문에 따르면 “喙部伊史夫智伊干”으로 비문의 맨 처음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한자표기는 다르지만 『三國史記』에 나오는 伊? 異斯夫가 틀림없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丹陽赤城新羅碑는 新羅가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異斯夫는 新羅가 영토 확장 정책을 펼 때 그 선도적 역할을 맡음으로써 후일 新羅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중요한 발판을 마련하는데 공헌한 인물이다. 혹자는 비의 건립 시기를 眞興王 10년(549)으로 단정하고 있다. 이에 대한 필자의 소견으로는 비문에 나오는 金庾信의 할아버지인 武力의 바로 앞에 나오는 阿干(新羅 의 관등 중 6위인 阿?) 比次夫의 관등이 『三國史記』 居柒夫傳에 의하면 新羅가 高句麗를 쳐서 竹嶺 이북의 10郡을 빼앗던 해인 眞興王 12년(551)에는 그보다 한 단계 위인 大阿?으로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이전의 일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확실한 연대를 파악할 근거는 없는 실정이다. 이는 아마도 眞興王 11년(550)에 공취한 道薩城과 金峴城의 위치에 비하여 丹陽의 위치가 훨씬 新羅 쪽에 가깝다는 점에서 추정한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