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차례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의 업적 고찰
Ⅰ. 머리글
4세기에서 6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에 고구려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전성기의 절정은 광개토대왕으로부터 장수왕 그리고 문자명왕으로 이어지는 시기였다. 특히 광개토대왕은 391년 18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412년 39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2년이라는 결코 길지 않은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의 영역을 사방으로 크게 넓히는 업적을 남겼다.
광개토대왕의 업적은 광개토대왕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 414년 아들 장수왕에 의해 세워진 웅장한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로 더욱 부각되었다.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는 엄청난 값어치를 가진다. 때문에 그 비문을 놓고 지금까지 수백 여편의 저서와 논문을 통해 연구되었다.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문을 둘러싼 논의는 주로 비문의 변조 사건과 기록...
본문/내용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의 업적 고찰
Ⅰ. 머리글
4세기에서 6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에 고구려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전성기의 절정은 광개토대왕으로부터 장수왕 그리고 문자명왕으로 이어지는 시기였다. 특히 광개토대왕은 391년 18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412년 39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2년이라는 결코 길지 않은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의 영역을 사방으로 크게 넓히는 업적을 남겼다.
광개토대왕의 업적은 광개토대왕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 414년 아들 장수왕에 의해 세워진 웅장한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로 더욱 부각되었다.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는 엄청난 값어치를 가진다. 때문에 그 비문을 놓고 지금까지 수백 여편의 저서와 논문을 통해 연구되었다.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문을 둘러싼 논의는 주로 비문의 변조 사건과 기록 중 辛卯年(을묘년) 기사의 倭(왜)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아직 명쾌한 결말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작 탈락된 글자를 둘러싸고 대의를 무시한 지엽적인 논쟁은 어찌 보면 영원히 결말이…
생각된다.
그리고 408년 7월 나라 동쪽에 독산성 등 여섯개의 성을 쌓고 평양 주민을 이주시킨 조치 역시 매우 의미심장한 조치이다. 이에 따라 평양에 대해서도 모종의 조치가 뒤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주 정책을 실시한 바로 그 다음달인 8월에 왕이 친히 남쪽 지방을 순행하고 있는 사실에서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그 아들 대인 장수왕이 재위 15년째인 427년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도 광개토대왕 때 이미 그 시초가 마련되었기에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평양의 중요성이 광개토대왕 때에 와서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도 위 짤막한 기록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은 이러한 의미있는 내치와 외치를 통해 영토확장과 국내안정을 동시에 도모했고, 결과적으로 그 아들인 장수왕대에 고구려의 최대 판도가 연출되고 그 후 약 2백년간 태평성세를 이루는 기초가 닦여졌다.
2. 광개토대왕의 外治(외치)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國岡上廣開土境平安 好太王(국강상광개토경평안 호태왕)`으로 불렸다. 또 國內城(국내성) 부근에서 발견된 牟頭婁墓(모두루묘)의 墨書銘(묵서명)에는 `國岡上廣開土地好太聖王(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으로 부르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廣開土王(광개토왕)`이라 하였다. 모두가 국토를 넓힌 왕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들이라 할 수 있다.
종래 광개토대왕의 외치에 대한 논의는 북진적 영토확장을 강조하던 경향과 질적인 측면에서 남진적 성격을 강조하는 경향이 대립되는 양상을 보였다. 북진적 성격에 대한 강조는 일제 시대 독립투쟁의 일환에서 민족주의 사가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는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반면에 고구려 대외정책을 입체적으로 검토하여 광개토대왕의 외치가 주로 남진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밝힌 연구도 나왔다.
광개토대왕의 외치는 그 후 장수왕의 대외정책의 성격과 평양천도로 미루어 볼 때 남변에 상당히 큰 중점을 두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