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詩風의 漢詩 受容 樣相 硏究
-고려 전기를 중심으로-
───────────────────◁ 목 차 ▷────────────────────
Ⅰ. 서론
Ⅱ. 송문화의 확산
1. 활발한 문화 교류
2. 문인들의 활동
Ⅲ. 고려 전기 한시의 송시풍 양상
1. 用事의 중시
2. 정교한 묘사
3. 議論의 중시
Ⅳ.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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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고려 전기1)는 260여년의 긴 기간에도 불구하고 학계의 관심과 연구 성과가 미흡한 실정이다. 특히 한시풍에 대한 연구는 문학사나 문학사상을 다루는 논문에서 잠시 언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처럼 연구가 미흡한 이유는 이 시대 문헌 자료의 전승이 매우 적다는 불가피한 상황도 있지만, 선인들의 견해를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이 더 큰 원인이라 생각한다.
고려 전기 한시풍에 대하여 선인들은 晩唐風이 지배하였고, 그로 인하여 유미적인 문학이 주조를 이룬 것으로 파악하였다.2) 이 견해는 신라말에 입당했던 유학생들이 만당시기에 들어갔기 때문에 만당풍을 체득했으며, 고려 사회는 삼국을 통일했지만 衣冠典禮는 신라를 답습하였기 때문에 騷壇의 풍토도 신라말에서부터 익혀온 만당의 풍상이 그대로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 전기 한시풍에 대한 연구자들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고려 전기의 한시풍은 晩唐風이라는 견해이다. 대표적인 연구자들은 문선규,3) 전형대,4) 민병수,5) 박성규,6) 변종현7) 등이다. 둘째, 다양한 시풍의 혼효로 보는 시각이다. 이 견해는 신라말부터 전해 온 만당풍에 의한 섬약한 정서, 내용이 없는 극단적인 형식미 추구라는 특징만으로는 신라말과 고려 전기를 적절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호승희,8) 이종문9) 등은 만당풍만의 관점에서 벗어나 다양하게 고려 전기의 시풍을 연구하였다. 물론 남아있는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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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고려사 열전에 입전된 周佇를 들 수 있다. 그는 문필에 능하여 외교문서의 초안이 그의 손에서 많이 작성되었다는 평가13)를 받았다. 그런데 국내 문사들의 수적 증가와 문학적 역량의 성숙 등으로 문종 연간에 들어오면서 귀화한인들에 대한 입장이 조금씩 변화했다. 문종 22년에 왕이 태자에게 명하여 송나라 진사 출신인 愼脩潛, 陳古, 儲元賓 등에게 옥청정에서 詩賦를 시험 보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14) 이것은 고려의 문학적 역량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송진사에게 辭賦의 시험을 부과한 것은 문종 22년의 것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또 문종 25년 5월에 송나라 사람으로 예빈성주부가 된 周沆은 본래 문예로 임용되었다. 그러나 그가 뇌물죄를 범하자 職田을 회수하고 돌려보냈다.15) 35년에는 擧子라 자칭한 송인 楊震이 여러 번 시험하여도 합격하지 못하자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있다.16) 이러한 기록을 보면 이 시기는 각 방면에서 귀화한인들에 대한 의존도가 약화되고 있지만 지속적으로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며, 이들을 통한 宋詩의 유입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귀화한인들은 문화교류의 창구 역할을 하였으며, 결과적으로 宋詩風의 확산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인적 교류뿐만 아니라 서적의 교류17)도 이 시기 송시풍의 수용과 확산 정도를 짐작케 해준다. 서적의 교류는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사신과 상인들을 통해서 부단히 전해졌다. 따라서 송나라에서 간행된 서적들이 고려로 반입되어 오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서적의 내용도 문집과 불경뿐만 아니라 다양한 서적이 망라되었다. 이런 서적의 유통구조 속에서 송대에 간행된 經史子集들이 유입되었고, 그 속에 송대의 체계화된 詩話書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增補文獻備考≫에 나오는 기록에 의하면 고려 사신들이 송나라에 들어가서 송나라 황제에게 책을 간청하여 얻어왔다고 한다.18) 소식은 고려 사신이 서적을 구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