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선진국 프랑스의 근현대사
1. 들어가며
9세기 무렵, 서유럽을 통일했던 프랑크왕국이 3개의 제국으로 나뉘면서 생겨난 서 프랑크왕국이 오늘날의 프랑스다. 초기의 프랑스는 정확한 국경의 개념이 없는 데다, 국왕 역시도 국토 전체를 관할하는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 봉건영주들이 뽑은 중재자에 지나지 않았던 국왕은 세금을 징수할 권한이 없었으며 마음 놓고 다른 봉건영주의 영지에 발을 들일 수조차 없었다. 이렇듯 왕권이 약하다 보니 프랑스는 영국과의 100년 전쟁, 그리고 36년 동안의 종교전쟁 등으로 통일과 분열을 계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과 분열은 왕권강화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관념의 변화와 부르봉왕조 초기 국왕들의 100여 년에 걸친 노력 끝에 프랑스는 루이 14세(1661~1715)에 이르러 전형적인 절대 군주제 국가로 변모하게 된다.
2. 봉건시대 프랑스의 모습
봉건시대 초기, 프랑스의 경제는 대부분이 소농 중심의 경제체제였으므로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통일을 이루고 주권을 갖추게 되자 프랑스 경제는 발전하기 시작했다. 10세기 이후, 농업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수공업과 상업도 활기를 띠었다. 그 결과 점차 인구가 늘어났고 신흥도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도시가 발달하자 새로운 사회 계급이 출현하게 되었다. 제3계급이라 불리는 이들은 대부분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가장 활력이 넘치는 계급 집단이었다. 제3계급은 귀족들이 자행하는 전쟁과 국토 분열로 인해 자신들의 상업 활동에 가해지는 엄청난 손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자연히 이들은 자금을 동원해 국왕의 중앙집권 강화에 조력했다. 즉, 프랑스의 절대군주제는 시민계급과 왕권 간의 협력 덕분에 이루어진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대외 팽창의 야망을 갖고 있었다. 이런 그가 재정대신 장 바티스트 콜베…
3. 현대 프랑스의 탄생
를 회복시켰다. 하지만 식민지 쟁탈을 놓고 벌인 대규모의 국제전쟁으로 엄청난 재정적 손실을 초래했다. 폴란드왕위계승전쟁(1733~1755), 오스트리아왕위계승전쟁(1740~1748) 등을 겪으면서 프랑스는 매번 실패와 후퇴를 거듭하다가 결국 영국과 벌인 7년 전쟁(1756~1763)에 패배함으로써 거의 모든 해외 식민지를 잃고 말았다.
3. 현대 프랑스의 탄생
7년 전쟁은 프랑스혁명의 간접 원인이 되기도 했다. 패전의 치욕을 갚기 위해 프랑스는 북아메리카 13개 주의 독립 전쟁을 대대적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미국을 돕는 데 무려 20억 리브르를 쓰는 바람에 40억 리브르의 적자 상태가 되고 말았다. 프랑스 국민들은 분노했고 결국 루이 16세는 175년간이나 중지되었던 삼부회를 소집해야만 했다. 프랑스대혁명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프랑스대혁명의 원인은 바로 절대왕권의 봉건성과 부패에 있었다. 인구의 겨우 2%에 해당하는 왕실과 귀족계급은 토지의 35%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각종 특혜와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국가의 재정부담은 제3계급이 안아야 했다. 제3계급 중에서 비교적 부유한 시민계급 즉, 자본계급이 가정 먼저 혁명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그들은 하층민들을 자신들의 동맹군으로 만드는 동시에 소농, 지주의 요구를 무상으로 들어주고, 도시 빈민의 생존권을 보장해 준다는 공약을 내세워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리하여 부르봉왕조를 뒤엎고 공화정을 세웠으며, 루이 16세를 단두대로 보냈다. 하지만 시민혁명으로 인해 프랑스에 즉시 자유와 민주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 제1제정을 세웠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전쟁을 벌였고 결국 완패하게 되자 부르봉왕조가 다시 파리로 입성하게 된다. 부활한 왕조의 실제권력은 모두 귀족계급이 갖고 있었다. 따라서 자본계급과 대중들은 투쟁을 계속했고 1830년 7월, ‘7월 왕정’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이들 역시 프랑스 자본계급 중에서도 폐쇄성과 보수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