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과 퇴고와 편집과, 詩
- 역사주의 비평(;원전비평)으로 본 윤동주
◆ 목 차 ◆
1. 들어가며
2. <오줌쏘개디도>와 윤동주와 퇴고
3. <아츰>과 윤동주와 편집
4. <별 헤는 밤>과 윤동주와 원전
5. 나오며
1. 들어가며
윤동주는 개화된 기독교 집안에서 보호 받으며 자란 내성적인 성격으로 민족 해방을 가로막는 조건들을 변화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식민지 억압 속에서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 자아 성찰의 깊이를 쌓아가며 자신의 역할과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부끄러워하며 민족 해방에 대한 확신을 가질 뿐이었다. 따라서 윤동주에 대해서는 그의 소극적 삶의 태도를 시와 연관시켜 그의 시는 감정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또한 윤동주가 시집『하늘과바람과별과詩』의 제목을 『병원』이라고 붙이려 했던 것에 대해 그의 심층심리를 밀폐된 병원에 묶여있었던 것으로 보고, 윤동주를 저항시인보다는 순수한 휴머니스트라고 보기도 한다.1) 반면에 그를 깊은 내면에 침잠해서 끝없이 자아를 찾으려고 갈등하고 괴로워했던 민족시인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많다. 이러한 윤동주의 소극적이면서도 민족적인 삶과 성격은 그의 시상에서 드러나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를 쓰는 과정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따는 얼마의 단어를 모아 이 졸문(拙文)을 지적거리는 데도 내 머리는 그렇게 명석한 것은 못 됩니다. 한 해 동안을 내 두뇌로서가 아니라 몸으로서 일일히 헤아려 겨우 몇 줄의 글이 일우어집니다. 그리하야 나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것이 그리 즐거운 일일 수는 없습니다. 봄바람의 고민에 짜들고 녹음의 권태에 시들고 가을하늘 감상에 울고, 노변의 사색에 졸다가 이 몇 줄의 글과 나의 화원과 함께 일 년은 이루어집니다.2)
이것은 윤동주가 ‘글을 쓰는 일’에 대해 얼마나 조심스럽고 고민스러웠는지에 대해…(생략)
① 제 1습작집 『나의 習作期의 詩 아닌 詩』, 시 59편 (이 중 1편은 제목만 있음)
② 제 2습작집 『창(窓)』, 시 53편
③ 산문 4편
④ 자선시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 시 19편
⑤ 습유시(拾遺詩)4)
1) 원고와 같은 색 잉크로 된 것 : 예 <거리에서>
2) 원고와 다른 색 잉크로 된 것 : 예 <오줌쏘개디도>
3) 푸른 색연필로 된 것 : 예 <풍경>
4) 주황색 색연필로 된 것 : 예 <창>
5) 연필로 된 것 : 예 <초한대>
(1) 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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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햇비>, <무얼 먹구 사나>, <굴뚝>, <아침>, <애기의 새벽>, <오줌싸개 지도>등의 동시들을 대하면 구체적이면서 쉽고 진솔한 시어로 짜여져 있어 순수하고 맑은 동심의 세계를 읽을 수 있다. 사실 윤동주는 1935년 12월에 뜬금없이 동시 <조개껍질>을 썼다. 윤동주의 시세계에서 놀라운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두고 혹자들은 "그가 유아적 퇴행현상을 보였다"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평소 우리가 아는 자아성찰 시인 윤동주와는 약간 거리가 있은 듯 보이지만 시기적 상황을 살펴보면 그럴 만도 하다. 가장 유력한 설은 윤동주가 정지용의 영향을 받아서 집중적으로 동시를 썼다는 것이다. 윤동주는 정지용 시인을 일생동안 가장 좋아했던 시인이라고 알려진다. 윤동주는 평소 정지용을 무척 존경해서 생전친구와 함께 정지용의 집에 찾아가 얘기를 나눈 적도 몇 번 있다고 한다. 당시 평범한 학생이었던 윤동주를 정지용은 특별히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윤동주 사후 첫 시 발표와 첫 시집 출간 발간사를 정지용이 써줌으로써 이들 간의 특별한 관계를 증명해주기도 한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동시`라는 장르가 크게 차지하고 있는, 1935년 10월에 서울 시문학사에서 출간된 당대 가장 저명 시인의 하나였던 정지용의 제 1시집『정지용 시집』과 연관시켜본다면 윤동주가 갑자기 동시를 많이 쓴 것이 해명될 수 있겠다. 이 중 <오줌쏘개 디도>는 윤동주의 동시 중 하나이다.
(1) 원전
오줌쏘개 디도
바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디도는
간밤에 내 동생
오줌 쏴서 그린 디도
우에 큰 것은
꿈에 본 만주 땅
그 아래
길고도 가는 건 우리 땅
(1936초)
*최초로 완성된 형태를 원전으로 삼았다.
<오줌쏘개 디도>는 최초 습작 노트에 7번째로 기록되었다가 나중에 『카톨릭少年』1937년 1월호에 ‘尹童柱’라는 필명 하에 ‘오좀 싸개지도 (地圖)’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던 작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