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근?현대연극사
1. 실내극장의 설립과 전통의 개량
근대극이란 내용적으로 근대적인 의식과 형식적으로 근대적인 연극 형식이 갖추어진 연극을 의미한다. 18-19세기의 판소리나 탈춤이 비교적 근대 의식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연극 형식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근대극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만큼 연극에서 형식은 매우 중요하다. 실내극장과 무대 조건이 구비되고, 연출과 연기의 개념이 성립되어야 비로소 근대극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근대극의 출발점은 근대적 연극 조건이 성립되는 시기인 1900년대로 볼 수 있다. 1902년 최초의 실내극장인 협률사를 비롯해 광무대 (1907), 원각사(1908) 등의 근대식 극장이 잇따라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협률사는 고종 등극 40주년을 맞아 내외 귀빈을 접대할 목적으로 황실에서 설립한 최초의 실내극장 이었다. 그러나 협률사에서는 근대극의 공연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여기에서는 1902년 12월 《소춘대유희》를 시작으로 하여 판소리 공연, 남녀 배우의 가무, 남사당패의 줄타기, 땅재주, 무동타기 등 전통연희가 주로 상연되었다. 광무대는 전통연희의 전용극장이라 할 만큼 연희 공연의 주요 무대가 되었으며, 원각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당시 신문 지상에서 계몽적 지식인과 언론인은 판소리를 비롯한 전통연희를 개량하자고 주자하였다. 이를 일러 연희개량이라 한다. 연희개량의 주장은 근대식 실내극장에 걸맞는 근대적 연극이 공연되지 못하는 현실의 모순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연희개량은 관객에게 풍속개량, 민지개발, 충효의열의 교훈을 줄 것을 목표로 하는 계몽운동의 성격을 지녔다.
1908년 11월 원각사에서 공연된 신연극 《은세계》는 창극에 가까운 형태로 공연되었다. 강릉의 양민 최병도가 원주 감사의 폭정으로 억울하게 맞아죽은 시로하를…
2. 신파극의 유입과 대중화
3. 근대극의 형성과 발전
낡은 신파극을 비판하고 새로운 근대극을 연구하여 실천하자는 목적에서 출발한 학생연극단체였다. 회원으로 김우진, 조명희, 홍해성 등이 활동하였다. 동경유학생들인 이들은 주로 방학을 이용해 고국 순회공연을 하면서 이 땅에 근대극이 뿌리내리는 데 기여하였다. 조명희작 《김영일의 사》, 홍난파 원작 《최후의 악수》등의 근대극을 상연하였다. 이 단체에 영향을 받아 전국 각지에 <경성갈돕회>, <형설회>, <송경학우회> 등과 같은 청년 연극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들은 근대극을 공연하면서 연극의 토대를 넓혔을 뿐만 아니라 민족계몽운동을 실천하였다.
그 중 <토월회>는 1922년 도쿄 유학생 박승희, 김복진, 김을한, 김기진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학생 단체였다. <토월회>는 1923년 귀국하여 박승희 작 《길식》, 치홉작 《곰》 등의 작품을 하였다. 1924년부터 <토월회>j는 박승희에 의해 전문 극단으로 탈바꿈하였다.
<극예술협회>, <토월회> 를 비롯한 연극 단체들은 학생운동 및 청년운동의 차원에서 이 땅에 근대극을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일시적으로만 연극운동에 관여하였다. 1920년대에 이들보다 더 전문성을 갖고 근대극의 기초 확립에 기여한 사람은 김우진과 홍해성이다. 김우진은 근대극 작가로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영녀》,《난파》, 《산돼지》 등과 같은 근대 희곡을 창작하여 우리나라의 근대극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이바지했다. 또 그는 서양의 근대극 작가와 작품을 소개한 연구자로도 유명하다. 홍해성은 근대극 연출가의 선구자이다. 그는 1924년에 일본의 근대극 단체인 스키 소극장에 입단하여 1929년 까지 5년 동안 활동하면서 수십 편에 달하는 서구 근대극 작품에 출연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배운 근대극 공연의 방법을 귀국 후에 극예술연구회와 동양극장 등에서 직접 실천하여 우리나라에 근대극이 정립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우리나라의 근대극이 확립되는 시기는 극예술연구회와 동양극장 등이 활동하는 1930년대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