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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발해사 인식
북한의 발해사 연구는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독립국가라는 점을 밝히려는 것이고, 둘째는 한국사의 정통성을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에서 찾아, 신라사 위주의 신라 중심적 남한 학계와 차별성을 두려는 것이다. 첫째의 문제는 남북한이 서로 공통점을 갖는 부분이다. 중국이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던 `홀한주도독부`로 간주하고 중국사의 일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째의 문제는 북한이 남쪽의 통설인 `통일신라`를 부정하고 `후기신라`로 규정짓고 `발해와 후기신라`라 하면서 발해를 앞세우고 있는 것이 다르다.
북한의 발해사 연구에서 최초의 논문을 작성한 이는 박시형이다. 박시형이 제시한 발해사의 기본적인 연구방향은 주영헌 등에 의해 고고학적으로 뒷받침되어, 조중공동발굴보고서를 시발로 {발해문화}에서 집대성되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중국의 발해사 연구는 전무했다. 1934년에 김육불이 집대성한 {발해국지장편}과 {동북통사}가 가장 대표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발해를 당의 지방정권으로 보는 중국사 중심의 발해사 연구는 `문화혁명`이 지나가고 79년부터 시작하여 1980년대에 적극화되었다. 아울러 남쪽에서의 발해사 연구도 1980년대 이전에는 별무했다. 따라서, 박시형과 주영헌의 이러한 연구는 한국사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 단지, 당시의 발해사 연구는 고구려사에 부수된 한 영역이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본격적이지 않았던 한계가 있었다. 북한의 발해사 연구는 몇 년간의 공백이 있다가, 1986년부터 다시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발해사에 대한 변화는 이미 1970년대말 `사회역사원리`로써의 주체사상이 역사학에 반영되면서 일어났다.
특히, 역사적 정통성과 관련하여 발해는 신라보다 우위에 있기 시작하였다. 1979년에 발간된 {조선전사}는 남쪽의 일반론인 …
1. 연구 배경
2. 연구 동향
(1) 주민구성문제
지역왕조에 지나지 않았으며 ② 우리 나라의 첫 통일국가는 고려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③ (신라를 통일국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발해를 조선력사에서 떼내려는 것이며 신라중심설과 신라정통설을 내세움으로써 남조선 괴뢰들의 매국배족적인 북진통일론에 그 어떤 력사적 근거를 제공하려는 어용행위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러한 북한의 발해사 위주의 역사인식은 북한이 옛 발해땅의 일부에 있다는 의미만으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북한 정권의 정통성론과 맥이 통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국가의 `창건`이란 표현을 발해와 북한 정권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이, 발해의 창건은 곧 북한정권의 창건과 비견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고구려-발해의 계승과 발해의 창건이 갖는 의미를 단순히 그들이 발해땅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 정권의 정통성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다.
2. 연구 동향
북한의 발해사 연구가 보다 적극화될 수 있는 배경은 그들 정권의 정통성 문제와 관련이 있으나, 모두를 그렇게 여길 수 없다. 학문적인 면에서도 북한의 발해사 연구는 결코 간과할 수 없을 만큼 발전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이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밝히는 부분은 우리가 눈여겨볼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단순히 정치적 주체사상의 한 단면으로 치부해 버리거나, 민족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국수주의적인 태도로 매도할 수도 없을 것 같다.
(1) 주민구성문제
발해사의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었는가 그렇지 않은 말갈인 들의 국가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발해의 주민구성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시라토리[白鳥庫吉]가 지배층의 고구려유민설을 언급한 이래 믿어지고 있는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말갈인 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남한과 일본의 대부분 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는 입장이다. 북한은 초기에 지배층의 고구려유민과 피지배층의 말갈설을 수용하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