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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신화
“영웅은 타고난 것이라기보다 만들어진 것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사실이 아닌 이미지에 의해 왜곡된 것이다.”
“나폴레옹 신화의 특징은, 나폴레옹 자신에 의해 대부분의 신화가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1796~1797년 로디·아르콜레·리볼리 전투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1년 만에 전쟁을 승리로 이끈 28세의 용장은 재빠르게 ‘이탈리아 원정군 소식’ ‘이탈리아 원정군이 본 프랑스’ 등의 소식지를 창간했다. 자신의 위용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다. 나폴레옹이 만토바를 함락시켰던 1797년 2월, 파리서 창간된 ‘보나파르트와 덕망가들의 신문’은 “한니발은 카푸아에서 잠을 잤지만 지칠 줄 모르는 보나파르트는 만토바에서 쉬지 않는다”며 젊은 장군을 치켜세웠다.
나폴레옹 우상화는 그가 황제가 된 뒤 절정으로 치달았다. 1806년 반포된 ‘제국 교리문답’은 “우리 황제를 경배하고 받드는 일은 곧 신을 경배하고 받드는 일”이라며 총대를 멨다.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프로이센 군대를 무찌르자 우상화는 극에 달한다. 독일 지식인들은 “전제군주를 내쫓고 자유·평등·박애의 혁명정신을 전파할 해방군”이라며 프랑스군에 환호했다. 헤겔은 1806년 예나 전투서 승리한 나폴레옹에 대해 “말을 탄 세계정신의 출현에 대한 존경”을 보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에 대한 경외심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린다. 1812년 러시아 원정 패배가 계기였다. 나폴레옹 군대가 점령군의 모습을 띠게 되자 독일 민족주의자 아른트는 “피에 굶주린 괴물에 맞서 궐기할 것”을 호소했고, 쾨르너·클라이스트 등은 “사탄의 추방”을 외치고 나섰다. 엘바섬으로 유배됐던 황제의 ‘백일천하’가 1815년 워털루 전쟁으로 끝나면서 제국의 역사는 …
하지만 나폴레옹에 대한 경외심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린다. 1812년 러시아 원정 패배가 계기였다. 나폴레옹 군대가 점령군의 모습을 띠게 되자 독일 …
<다비드가 그린 유화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