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서유견문
(1)『서유견문』에 대해..
한말(韓末)의 정치가 유길준(兪吉濬:1856~1914)이 미국 유학 때 유럽을 순방하며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최초의 국 ·한문 혼용체로 된 책으로써 활자본. 1책. 1895년(고종 32) 간행. 모두 20편(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 2, 19, 20편은 세계의 인종 ·물산(物産) ·도시, 3∼4편은 국가의 주권(主權) 및 교육 문제, 국민의 권리문제, 5∼6편은 정부의 기원(起源) ·종류 ·제도 ·직분, 7∼8편은 세금 ·국채(國債) 문제, 9편은 교육 ·군대양성 문제, 10편은 화폐의 본질 ·법률 ·경찰의 역할과 규칙, 11편은 서양 각국의 정당 ·직업 ·윤리 ·개인의 건강 문제, 12편은 서양의 학술 ·군제(軍制) ·종교 ·역사 등의 개관, 14편은 상인(商人)의 위치와 역할, 개화(開化)의 바른 길, 15편은 예절 문제, 16편은 서양의 풍속 ·습관, 17편은 사회복지제도, 18편은 서양의 근대기술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의 출간(出刊)으로 당시의 신문 ·잡지가 비로소 국한문혼용체를 많이 따르게 되었고, 또 새로운 개화사상(開化思想)에 눈을 뜨게 하여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사상적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2) 형식과 내용
서유견문은 국한문혼용체로 그 내용을 활자로 조판하여 직접 현판인쇄를 하거나 또는 조판한 판을 가지고 연판을 떠서 연판 인쇄한 활자본이다. 이 책의 출간(出刊)으로 인해 당시의 신문·잡지가 국한문혼용체를 많이 따르게 되었고, 새로운 개화사상(開化思想)에 눈을 뜨게 하여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사상적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서유견…
(3) 미친 영향
실패로 말미암아 그의 개화관 혹은 개혁관이 현실의 시세와 처지를 중시하는 쪽으로 변화된 데에서 찾아질 수 있다.
그는 ‘시세’와 처지를 고려하지 않은 채 외국의 것만을 숭상하고 자기나라의 것을 업신여긴 ‘개화당’을 `개화의 죄인‘으로, 외국인과 외국의 것을 무조건 배척하고 자기 자신만을 최고라고 여기는 ’수구당‘을 ’개화의 원수‘로 아무런 주견 없이 개화의 겉모습만 따르는 자들을 ’개화의 병신‘으로 각각 규정하였다. 한마디로 그는 개화를 반대, 배척하는 수구파들보다 현실을 무시한 채 성급하게 개화를 추진하였던 갑신정변의 주도세력을 더욱 신랄하게 비판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시세’와 ‘처지’를 감안하여 ‘집중’의 태도를 취해야 된다는 입장은 개화에 대한 유길준의 핵심사상으로서 개화의 등급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즉 그는 개화를 맹목적인 허명개화를 지양하고 현실에 맞는 실상개화를 추진하자고 재차 역설하였던 것이다.
(3) 미친 영향
1896년 2월에 국왕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유길준이 일본에 망명함에 따라 서유견문 역시 정부로부터 금서조치를 당한 결과 국민계몽이란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널리 보급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듯이, 아관파천으로 갑오개혁 때 추진된 근대적 제도개혁을 전면 중단시킨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갑오개혁 당시 유길준의 행적에 대한 비판은 있었을지언정 개화사상서인 서유견문에 대해 엄격한 금서조치가 내려질 만한 분위기가 팽배해 있지는 않았다. 따라서 서유견문은 개화 혹은 개혁을 지향하는 사람들에 의해 널리 활용됨으로써 다음과 같이 개화사상을 널리 퍼뜨리고 개혁의 필요성을 홍보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서유견문이 미친 영향을 정리해보면 첫째, 서유견문이 금서로 취급받지 않은 단적인 예로는 학부에서는 서유견문 등을 시의의 합용한 서적으로 평가하고 이를 소학교 학생들에게 읽히라고 권장하였던 것이다. 우선 서유견문 등의 서적들을 보냈다는 점으로 미루어 이들을 교과서로 사용하도록 조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