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목민심서
Ⅰ. 서론
목민심서는 고금의 여러 책에서 치민에 대한 도리를 논술한 책이다. 저자인 다산 정약용은 조선 순조 시대 학자로서 실학을 대표하는 학자이다. 내가 목민심서를 선택한 이유도 정약용의 실학 사상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자가 순조 때 천주교 박해로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가 있는 동안 저술한 것으로 우리 나라와 중국의 역사 서를 비롯한 여러 책에서 자료를 뽑아 수록하여 목민관이 여러 일을 함에 있어서의 일의 처리방법, 사람을 대할 때의 몸가짐 등을 아주 세세하게 예를 들어서 목민관의 자세를 알려주고 있다. 이를 토해 지방의 관리들의 폐해를 제거하고 지방 행정을 쇄신하려고 한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어쩌면 이렇게 아주 작은 부분까지 신경을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대에 특히 정약용의 신분으로써 생각하기 힘든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치려고 노력한 것에 대해 많은 감명을 받았다. 정약용은 그의 정책을 직접 실행하지 못하고 단지 글로써 밖에 그의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가 정권을 잡고 그의 뜻대로 정책을 펼쳤다면 백성을 좀 더 생각하는 사회가 되었을 수 도 있었겠지만 어쩌면 그가 글로써만 그의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그가 존경받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가 직접 정치를 했다면 이론과는 다른 현실을 경험하면서 그도 다른 수령과 같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Ⅱ. 본 론
1. 목민심서의 내용
먼저 제1편의 부임은 제배(除拜) ? 치장(治裝) ? 사조(辭朝) ? 계행(啓行) ? 상관(上官) ? 이사(이事)의 6조로, 제2편의 율기는 칙궁(飭躬) ? 청심(淸心) ? 제가(齊家) ? 병객(屛客) ? 절용(節用) ? 낙시(樂施)의 6조로, 제3편의 봉공은 첨하(瞻賀) ? 수법(守法) …
위의 여섯편은 《경국대전》의 6전에 준거(準據)하여 목민관의 실천 정책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3. 목민심서와 실학의 의의
(勸分) ? 규모(規謨) ? 설시(設施) ? 보력(補力) ? 준사(竣事)의 6조로, 해관은 체대(遞代) ? 귀장(歸裝) ? 원류(願留) ? 걸유(乞宥) ? 은졸(隱卒) ? 유애(遺愛)의 6조로 이루어지고 있다.
요컨대, 이 책의 전편에 흐르고 있는 저자의 지방행정의 원리는 관(官)의 입장에 서서 논한 것이 아니라, 민(民)의 편에 서서 관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폭로 ? 고발 ? 탄핵 ? 경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2. 목민심서의 중요 어구
목민심서에 있어서의 중요어구는 청렴, 애민, 덕망, 충, 효 등 유교의 관점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목민심서는 성리학에서 다루는 인간 내적인 우주?자연의 이치 및 기운 등의 문제와 인간심성의 탐구의 범주보다는 선진유학에서 다루어 왔던 인간관계에 착안한 윤리?도덕에 비중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해 유교 사상이 소망하는 목표인 자기수양을 통해 자신의 경지를 성인의 단계까지 높이고 유교에서 오늘날에 윤리라 불리어지는 ‘수기’와 정치문제인 ‘치인’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와 같이 현실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상상적 근간을 유교로 두고 있으면서 기존의 성리학적 비판과 현실 비판으로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이는 아래의 글에서 잘 나타난다.
청렴이란 수령이 지켜야 할 근본 요체이고, 모든 선(善)의 원천이며 모든 덕(德)의 근본이다 따라서 청렴하지 않고 능히 수령 노릇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우리 조선에 청백리(淸白吏)로 뽑힌 자가 통틀어 110명인데, 태조(太祖) 이후에 45명, 중종(中宗) 이후에 37명, 인조(仁祖) 이후에 28명이었다. 경종(景宗) 이후로는 드디어 이렇게 뽑는 것조차 끊어지고, 나라는 더욱 가난해지고 백성을 더욱 곤궁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한심하지 않는가! 400여년 동안 예복을 입고 조정에서 벼슬한 자가 거의 천명이나 만명인데 그중에서 청백리로 뽑힌 자가 겨우 이 수에 그쳤으니 역시 사대부(士大夫)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3. 목민심서와 실학의 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