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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왕후, 그가 역사에 남긴 빛과 그림자
11월 6일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 103년이 되는 날이다.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한 듯 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떨칠 수 없다. 우선 그에 대한 호칭마저도 온전치가 못하다. 민비? 명성왕후? 혹은 명성황후? 그 어느 경우도 우리에게 흡족한 해답이 아닌 듯 하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그가 시해된 지 2년 후에 追尊된 명성황후라는 호칭을 사용코자 한다. 그것이 비운에 간 그녀에 대한 예우요, 대한제국 최초의 황후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되기도 하겠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문호개방은 자주적인 입장에서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사적 시련을 수반하고 있었다. 개항전후의 조선사회는 정치적 혼란과 재정적 궁핍, 그리고 사상의 혼돈 등 전통사회의 내재적 붕괴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 한 가운데 명성황후가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그녀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배경, 대원군과의 갈등과 정치적 궤적, 그리고 명성황후에 대한 또 다른 평가 등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I . 명성황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배경
역사의 라이벌 명성황후와 대원군은 서로 뗄 수 없는 인연으로 만나 각자의 위치에서 탁월한 능력과 결단력으로 시들어 가는 조선왕조의 불꽃을 마지막으로 살려내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듯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왕조의 몰락을 재촉한 비극의 한 가운데서 역사의 조명을 받게 되었음은 잘 알려 진 바와 같다.
純祖 즉위(1800) 이후 3대 60여 년에 걸친 외척의 발호와 전횡으로 인한 세도정치는 국정의 난맥상을 드러냈다. 온 몸으로 이를 체험한 왕손 李昰應은 유명무실해진 왕권회복을 위해 切齒腐心, 시정에 엎드려 기회를 엿보다…
II . 명성황후와 대원군과의 갈등과 정치적 궤적
정, 유지해나갔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소용돌이를 틈타 재빨리 뛰어든 일본은 ??미개를 문명시킨다.??는 구호아래 갑오개혁을 강요하였다. 일본의 침략적 야심을 간파한 명성황후는 일본의 배후에 있는 개화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親러시아 정책을 내세우고 노골적으로 일본과 관련 세력들에게 대항하였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대륙침략의 기세가 오른 일본을 견제해야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여러 이익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한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에 압력을 가하였다. 소위 3국 간섭이 그것이다. 열강의 압력에 변화된 자세를 취하는 일본의 태도를 감지한 민씨 정부는 더욱 親러정책을 강화해 갔다. 일본의 한반도 침략정책에 정면으로 맞서는 민씨와 親러세력을 제거하지 않고는 조선을 장악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된 일본은 마침내 권력의 핵심인물인 왕비를 제거하기 위한 모종의 음모를 획책하기에 이른다. 즉 일본은 이노우에(井上馨)공사를 소환하고 대신 예비역 육군 중장 미우라(三浦梧樓)를 공사로 파견해 극비리에 왕비제거 작전을 추진했던 것이다. 일본은 때마침 解散說로 민씨 정부에 불만을 품은 훈련대의 간부들을 끌어들이고 거사일 새벽 대원군을 위계로 종용해 浪人輩를 앞세워 궁성을 공격했다.
1895년 11월 6일(음력 10월 8일) 새벽, 궁성으로 난입한 일본공격대는 저항하는 시위대와 책임자(이경직), 그리고 대신들을 거침없이 사살, 살해하고 왕과 왕세자를 협박하고 위해하며 마침내 왕비의 침전에 난입했다. 그리고 폭도들은 한 나라의 왕비를 무자비하게 시해하는 야만적 暴擧를 자행하니 참으로 치욕적이고 서글픈 역사의 한 순간-을미사변이었다. 당시 왕비 시해에 참여했던 고바야가와(小早川秀雄)의 회고록에 의하면 ??일본이 너무 충실하게 조선의 내정 개혁에 착수했기 때문에 민비는 그러한 간섭을 싫어하고 조선왕실에 대해 환심을 사려고 애쓴 러시아에 더 의지하고 싶어했다.…… 러시아와 조선왕실이 굳게 손잡고 온갖 음모를 추진하고 있는데 대해서는 一刀兩斷, 그 한쪽의 손을 잘라내는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