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독립신문
(1) 창간
<독립신문>은 개화기 우리 민족의 정신을 일깨우는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 1896년 4월 7일 창간한 이후 1899년 12월 4일 폐간되기까지 구시대의 사고를 혁신시키고 민중들에게 신(新)학문, 신(新)사고를 유도함으로써 민족정신의 계몽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독립신문>이 탄생하고 발전하기까지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은 서재필 박사이다. 20세이던 1884년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에 가담하였다가 실패함에 따라 역적으로 몰려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890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 국적을 취득한 서재필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여성과 결혼하였다.
그 후 국내에 친일 내각이 들어서자 갑신정변 가담자들에게 사면령이 내려졌다. 서재필은 1895년 귀국하여 미국시민의 신분으로 조선 정부의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서재필은 개화를 위하여 신문을 창간하기로 마음먹고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대한제국 정부는 신문 창간에 필요한 경비로 3천 3백 원을 서재필에게 지원하였다. 이리하여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이 탄생하게 된다.
처음에는 격일간으로 A3판형에 한글 3면, 영문 1면의 총 4면으로 발행했다. 그러다 1897년 1월부터 영문판을 따로 떼어 2종으로 나누었다. 영문판은 판형을 가로 24cm, 세로 37cm로 키우고 구독료도 한글판보다 비싸게 매겼다. 1898년 4월 한국 정부는 서재필을 중추원 고문직에서 해임하였다. 이로써 독립신문은 아펜젤러가 사장이 되고 윤치호가 주필 겸 경영을 맡았다. 이를 계기로 그해 7월1일부터는 독립신문이 격일간에서 일간으로 바뀐다. 판형은 B5로 줄었다. 1899년 9월부터는 A4로 환원된다.
1899년 12월 4일 조선정부는 서재필에게 4천원을 주고 독립신문의 판권과 인쇄시설을 매입한다. 독립신문이 폐간된 날이다. 창간 이후 폐간되기까지 43개월 동안 총 776호가 나왔다.
(2) 특징
…
(3) 역할
① 논평과 비판을 신문의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삼았다. 논설을 1면 머리에 실어서 정부와 위정자들의 비정(秕政)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를 폭로하였다.1)
② 국민의 권리와 의무가 무엇인가를 가르친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며 관리는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임을 알린다. 관존민비(官尊民卑)의 봉건적인 전제 군주 치하에 억눌려 살던 국민들로서는 처음 깨닫게 되는 새로운 사실이었다.
③ 국가의 안위가 위태로웠던 당시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위치가 어떠한가를 가늠할 수 있게 했다. 서구 열강이 국가의 이권을 탈취한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국가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저항하도록 했다.
④ 한글을 전용하고 띄어쓰기를 실시하여 누구나 읽기 쉽도록 만들었다. 후에 창간하는 다른 민간 신문 가운데는 국한문 혼용 신문과 한글 전용 신문이 있는데 한글 전용 신문은 <독립신문>의 선구적인 한글 전용을 뒤따른 것이다.
⑤ 구독료를 싸게 하여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⑥ 신문이 광고 매체로서 기능이 있음을 실증한다. 광고료를 수입원의 중요한 부분으로 삼아서 독립적인 사업으로 신문을 운영할 수 있음을 제시하였다.
⑦ 독립협회의 창립을 위한 일종의 사상적 준비 작업을 하고, 독립협회의 창립 후에는 그 기관지(또는 대변지)의 역할을 하면서 독립협회의 사상 형성과 독립협회의 자주, 민권, 자강 운동의 전개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⑥ 신문이 광고 매체로서 기능이 있음을 실증한다. 광고료를 수입원의 중요한 부분으로 삼아서 독립적인 사업으로 신문을 운영할 수 있음을 제시하였다.
⑦ 독립협회의 창립을 위한 일종의 사상적 준비 작업을 하고, 독립협회의 창립 후에는 그 기관지(또는 대변지)의 역할을 하면서 독립협회의 사상 형성과 독립협회의 자주, 민권, 자강 운동의 전개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4) 독립신문의 의의
<독립신문>은 이전에 있었던 <한성순보>나 <한성주보>의 뒤를 이어 발간되었으며 이후에 등장한 <매일신문>, <제국신문>과 <황성신문> 등의 민간 신문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이다. 또한 과감한 한글 전용으로 국어 운동사에 획기적인 공적을 남겼다. 이는 서재필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왔기 때문이 미국의 뉴저널리즘의 영향을 받았고 서양식 띄어쓰기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한글 사용과 띄어쓰기의 도입으로 이전의 신문과는 달리 조선인 모두가 신문을 좀 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국어학자로 잘 알려진 주시경 선생이 <독립신문>에서 일했었다는 것으로 비추어 봐도 <독립신문>의 한글 전용이 주는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독립신문>은 몇몇 계몽 사상가와 정부 관료들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탄생한 것이다. 서구의 다른 나라들처럼 필요에 의해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난 신문들에 비하면 시작은 별로 좋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독립신문>이 초기부터 국민을 계몽하고 국가를 비판하는 순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한국 언론사에 중요성을 지니며, 신문의 전통을 세울 수 있게 한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립신문>은 비평과 공론조성의 기능,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 언론의 자유주의 사상과 민주주의 사상을 전파하는데 기여했다. 당시 조선이 군국제 국가였다는 점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것이 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를 강도 높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