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기독교의 수용
1) 시대적 배경
(1) 서양문명의 수용과 개화
1880년대는 조선이 은심한 나라로부터 구미 여러 나라와 통상수호조약을 연이어 맺음으로써 개화시대로 돌입하는 변화가 전개되는 시기였다.
조선의 쇄국정책은 일시 성공하였으나,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신흥 일본의 진출로 말미암아 조선은 그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일본은 1868년 명치유신정부를 수립하여 서양의 근대적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이는 한편,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여 근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명치유신의 외교정책 가운데는 개화주의와 아울러 외국에 대한 침략주의가 도사리고 있었다. 일본의 자본주의는 국내시장이 비좁아, 일찍부터 상품의 해외진출을 꾀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따라서 해외시장을 구하기 위한 군국적 침략주의가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일본은 조선에 눈을 돌려 개국을 교섭하였다. 우리 정부는 신(申) 등을 강화도로 보내어 일리(日吏) 흑전청륭과 협상을 거듭한 끝에 1876년 2월에 수호조약을 맺었다. 이리하여 체결된 것이 병자수호조약이다.
병자수호조약의 체결을 기점으로 이어서 1882년에는 이것이 전례가 되어 미국, 영국, 독일 사이에 통상수호조약이 이뤄졌고, 1884년에는 러시아와 1886년에는 불란서 그리고 1892년에는 이태리와의 사이에 통상수호조약이 맺어졌다.
이로서 개화의 물결은 조선에 밀려들어와 서양의 새 문명이 수용되고 근대화를 추진시킬 계기가 마련되게 되었다.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면서 서양의 문명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신문화의 수입을 위한 노력이 1876년 김기수를 중심한 사절단 75명이 수신사의 자격으로 일본을 시찰한데서부터 시작된다. 1881년 5월에 정부는 대규모의 일본 시찰단을 보내…
한편 이해 11월에는 김윤식을 영선사로 삼아 60여명의 학생들을 이끌고 청국의 천진으로 건너가 신식무기의 제조법 및 조종법을 배워오게 하였다.
(2) 개화파의 교육관
찾고저 했다.
그러다 1884년 12월에 수구파의 민영익이 피척 되었는데 이때에 Allen의 지극한 정성과 기술로 그를 치료하여 완쾌시킴으로써 국왕의 신임을 얻게 되자 그는 선교사업으로 조선을 개화시키려는 목적을 표시하였다.
1884년 4월에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 H?G?Underwood가 같은 해 6월에 감리교 선교사 H?G?Appenzeller 부부가 조선 땅에 오게 되었다.
이렇게 조선에 대한 선교의 기운이 조성되자 각 교파들이 다투어 입국하여 선교?의료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교육과 의료를 중요한 선교수단으로 삼아 의료에 의한 조선인의 불행을 구하고, 교육을 통한 계몽의 방법을 강구하여 서양의 근대문화를 이 땅에 소개하는데 주도적 소임을 다했다. 이에 따라 많은 수의 조선인이 기독교도가 되고, 그들이 설립한 학교에서는 개화사상의 강화를 이끌었고, 개화 인사를 배출하였으며 사회적?문화적 영향력을 저변으로부터 작용시켜 근대문명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2) 개화파의 교육관
186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이른바 문명개화론 서양의 근대사상이나 기술문명을 흡수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박규수, 오정석, 유대치를 위시하여 그 밑에 김옥균, 박영효, 김윤직, 서선범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대원군의 대외 쇄국정책이 끝난 뒤에는 각 방면에 걸쳐 서양문명 수용 논의는 더욱 활발히 거론되었다. 따라서, 근대학문을 교육시키자는 논의가 나오고 있음은 당연하였다.
김기수와 김인집을 중심으로 한 수신사가 두 차례나 일본에 가서 군사?교육?산업의 발전상황을 시찰하고 돌아옴으로써 근대적 선진문명에 대한 의욕을 높여 갔다. 1881년 신사유람단과 김옥균의 일본 방문은 신교육에 있음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외국에 유학하는 학생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신사유람단으로 동행했던 24명의 청년 중 윤치호, 유길준, 류원수 등 3인이 동경에 전유하여 공부하게 되었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신교육을 받는 최초의 일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