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계급문학 운동의 성립 과정
1) 파스큘라?염군사 및 카프의 결성 과정
◎ 파스큘라?염군사
국내에서 사회주의 사사의 확산과 새로운 문화운동의 조류가 형성되던 시기, 김기진은 일본에 유학하면서 그곳에서 팽창하고 있는 사회주의사상과 노동조합 운동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는다. 특히 그는 일본의 사회주의자 아소오 히사시와 접촉하면서 그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일본으로부터 귀국하여, 1923년 7월과 9월의 두 번에 걸친 공연을 끝낸 김기진은 그의 형 김복진과 연학년?안석주 등과 더불어 ‘토월회’에서 탈퇴한다. 거기서 탈퇴한 김기진?김복진?연학년은 벽영회?김형원?이익상?이상화와 더불어 새로운 경향의 문예운동을 꾀한다는 목적 하에 ‘파스큘라(PASKYULA)`를 결성한다. 이 단체의 이름은 ’박‘에서 `PA`와, ’성해, 상화‘에서 ’S`와, ‘김’에서 `K`와, ‘연’에서 ‘YU와, ’이‘에서’L`과, ‘안’에서 ‘A’자를 각각 따서 만든 명칭이다. 파스큘라의 결성취지는 ‘인생을 위한 예술’ ‘현실과 싸우는 의지의 예술’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파스큘라의 존재가 세상에 처음 드러난 것은 1923년 겨울, 천도교 기념관을 빌어 그들이 주최한 문예 강연회를 통해서였다. 구성원의 성격을 보면, 김형원은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이면서 시인이었고, 김복진은 조각가를 지망하고 있었으며, 안석영은 화가였고, 연학년은 극연출 지망자였다. 시나 소설을 쓰는 사람들로만 동인을 모았던 당시의 문예운동 단체 가운데서 파스큘라는 이색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당시에 파스큘라와 얼마간 유사하면서도 특이한 성격을 띠고 있는 문화운동 단체로 ‘염군사’가 있었다. 염군사와 파스큘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염군사는 작품활동 뿐만 아니라 여타의 수단을 통한 사회운동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염군사’의 구성은 1920년대 초반 최초의 무산문학 잡지를 꿈구었…
◎ 파스큘라오 염군사 비교
점은, 북풍회 계열의 염군사와 대조되는 사실이다.
◎ 염군사가 파스큘라와 합작을 요구하는 이유
염군사의 송영?최승일 등이 계보를 달리하고 있는 서울청년회 계열의 파스큘라와 합자작을 요구하고 있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대개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염군사의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문단활동에 대한 욕구와 관련된다. 염군사의 구성원들은 최승일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 무렵에 문단적인 활동을 제대로 경험해 본적이 없다. 그들은 모두 문학 지망생일 뿐 구체적인 작품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파스큘라의 구성원들은 기성 문단에서 각자 나름대로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며, 특히 「개벽」이라는 중요한 매체를 기반으로 상당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염군사의 구성원들이 경향적 문학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결국 기성 문단에서 새로운 문학의 전개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파스큘라의 도움이 필요했으리라는 점이 모두 송영?박세영 등의 배재고보 선배들이라는 학연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도 어느 정도 점칠 수 있는 것인데 뒤에 송영이나 김영팔의 기성 문단의 진출이 모두 「개벽」지의 현상문예를 통해 이루어지게 도니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둘째는 경향성을 드러낸 문학 운동이 갖는 집단적 속성과 그 조직의 요구를 들 수 있다. 염군사나 파스튤라가 모두 표면화되어 나타난 운동?조직으로서의 성격이 약하다는 점에서 볼 때, 기성의 사회 운동단체의 조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조직에 대한 요구가 문단에서 단순한 동호인적 집단이 아닌 사상성의 요건을 구비한 집단의 출현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염군사의 성향과도 잘 맞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염군사 자체가 바로 그러한 자기 조직의 속성을 통해 그 확대를 요구할 수 있었으리라고 추측되기도 한다.
◎ 조선청년총동맹의 창립과 의의
염군사의 송영 등이 제한한 염군사와 파스큘라의 합작은 쉽게 타결을 보지 못한다.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