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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몰락 : 隋 煬帝의 고구려 출병과 阿片戰爭
1. 수의 고구려 원정과 실패
589년, 後漢(후한) 이래 약 400년간의 정치적 분열을 통일시켰던 수 文帝(문제)는 599년 고구려의 요서 침입에 水·陸(수·륙) 양면으로 군대를 출동시켰으나 실패하고 고구려의 형식적 사죄에 만족하고 원정을 수습하였다. 이러한 미완의 원정은 고구려 재원정의 주장에 따라 煬帝(양제)의 612년, 613년, 614년 3차에 걸친 원정을 초래하였다. 1차 원정은 수의 참담한 패배로 끝이 났다. 2차 원정 역시 양현감(楊玄感)의 국내 반란으로 급거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3차 원정은 극도로 피폐했던 고구려가 고구려왕의 입조(入朝) 등 항복요구에 응함으로써 원정을 종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의 고구려원정은 백성들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특히나 1차 원정은 薩水(살수)대첩에서 30여만 명 가운데 생존자가 불과 2,700명이라는 엄청난 인적손실이 발생하여 원정의 거점에 가까운 산동·하북지방을 중심으로 농민의 봉기가 많이 발생하였다. 2차 원정 중에 수 양제의 즉위에 공을 세운 대관 楊素(양소)의 아들로서 당시 후방의 한 기지에서 군량수송의 지휘관으로 있던 양현감의 반란은 봉기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 효과를 야기하였다. 양현감의 반란은 지배층 내부의 투쟁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지만, 高官(고관)의 반란이라고 하는 사실은 隋朝(수조)의 동요를 천하에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그 이후 각지에서 반란이 연이어 일어나 전국이…
그러나 수의 고구려원정은 백성들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특히나 1차 원정은 薩水(살수)대첩에서 30여만 명 가운데 생존자가 불과 2,700명이라는 엄청난 인적손실이 발생하여 원정의 거점에 가까운 산동·하북지방을 중심으로 농민의 봉기가 많이 발생하였다. 2…
2. 아편전쟁
① 아편전쟁 이전의 대외무역 관계
[8월 1일의 탄생화 양귀비 꽃. 양귀비 꽃 과실에서 추출된 진액이 마약으로 사용]
② 중국의 아편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