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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근대사가 남긴 역사 유적
오늘날 목포지역에는 위에서 살펴본 개항 이후 일제시기까지의 역사가 남긴 유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최근 이들 유적들을 ‘일제 잔재’ 라 하여 철거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부에서 일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역사의 흔적은 인위적으로 지우려 한다고 해서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또 일제시기의 건물을 철거하자는 주장에는 과거 식민지 시기를 부끄러운 역사로 간주하는 심리가 그 바탕에 깔려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해방된 지 50년을 넘긴 시점에 살고 있고, 또 국제사회속에서 한국의 위치도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따라서 이제는 오히려 식민지시기의 역사적 유적들을 보존하여 앞으로 다시는 이러한 불행한 시기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역사의 교훈의 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철거 직전까지 갔던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은 식민지 시기 일본인들의 경제침탈을 상징하는 건물로서 조선인들의 원한이 서린 곳이다. 한국 근대사에서 개항장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목포의 구 일본인 거류지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당시의 흔적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이다.
목포만이 보여 줄 수 있는 특색 있는 역사관광 유적으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해본다면, 목포의 옛 일본영사관을 ‘한국개항사 자료전시관’ 으로, 동척건물을 ‘식민지경제침탈관’ 으로 만들어 이 지역을 새로운 문화 유적의 거리로 탈바꿈시켜 보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위와 같은 취지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에 그들이 남긴 역사유적들 중 일부를 관찰함으로써 일제가 조선인에게 어떤 피해와 이익을 주었는가를 논하고자 한다.
(1) 동본원사 목포별원(東本願寺 木浦別院)
현 목포중앙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건물은 목포의 첫 불교사원인 동본원사 목포별원이 있던 곳이다. 정식명칭은 진종(…
(2) 무안감리서(務安監理署)
상인들의 횡포에 대항하는 조선인 부두노동자들의 노동쟁의시에 일본낭인들이 감리서에 난입하여 갖은 행패를 부렸으나, 당시의 6대 김성규감리(金星圭監理)는 끝까지 단호하게 조선 노동자들 편에 서서 조선인의 이익을 옹호하였다.
감리직은 무안부윤(務安府尹)이 겸임했다. 1897년 목포개항과 함께 제 1대 감리인 진상언(秦尙彦)이 발령장을 받았고, 청사는 처음에는 목포진(木浦鎭)〔만호청(萬戶廳):목포시 만호동〕를 수리하여 임시청사로 사용하다가, 1899년 지금의 신안군청 자리로 신축·이전하였다. 무안감리는 1906년 10월 제 10대 이무영 감리(李懋榮 監理)를 마지막으로 폐지되고, 무안부(務安府)로 개편되었다가 1910년 일제에 의해 한일병합이 이루어지면서 폐청되었다.
현재 무안감리서의 흔적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시간의 흐름 속에 청사가 중수되면서 옛 건물이 완전히 소멸되었다. 다만 신안군청의 뒷뜰에 일부 남아 있는 석조건물(신안군청 서고)과 석조건물 중앙에 박혀 있는 자물쇠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잔상이 묻어나는 정도이다. 이외에 신안군청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초원빌라 담자락에는 허리춤까지 매몰된 비석 1기가 역사의 흔적을 대변해 주고 있다. 높이 135센티미터의 <총순구종명공적비>가 바로 그것이다. 총순 구종명은 무안감리의 지휘감독을 받고 있던 경무서 소속의 경찰이다. 구종명은 총순의 신분이었지만, 일본인과 조선인과의 분쟁이 일어날 때마다 조선인의 권익을 위해 앞장섰다. 법률지식이 없는 노동자들 대신 재판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여 법원에 제출함으로써 스스로 조선인들의 방패막이 되었다. 이에 주민들은 1906년이라는 시대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연석을 곱게 다듬어 공적비를 세웠다. 실제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는 무안 감리서의 흔적을 더듬으며, 인위적인 역사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인식하자는 목적이다.
무안 감리서는 목포가 개항되자 외국 영사관에 맞서서 조선의 지방 사무 및 외교사무를 관장했던 관아로 조선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관공서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