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동국통감(東國通鑑)』
1. 서론
사론(史論)은 역사서술에 있어서 편찬자(編撰者)의 사관(史觀)을 표현하는 가장 뚜렷하고 직접적인 방법이다.1)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관찬사서(官撰史書)는 사론(私論)을 달아놓았고, 조선왕조실록에서 무수한 사론이 등재되어 있다. 왕조실록은 성종 시기부터 사론이 폭발적으로 수록되는데, 이는 사림(士林)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성종 9년과 시기와 같으므로, 사론이 사림의 진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2)
따라서 『동국통감』이 당시의 편찬자들의 논찬이 수록되고 사론이 증가한 것은, 국초부터 심혈을 지울여 편찬해온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물론, 불과 성종 7년에 편찬된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와도 판이하게 다른 양상을 띤다. 더구나 『동국통감』이 훈구와 사림의 합작임에도 사론의 대다수를 사림이 저술하고 있어, 성종조 사림의 역사인식을 엿볼 수 있는 파격적인 사료로 주목된다.
『동국통감』은 기존에 존재한 많은 사론을 합쳐 총 385편의 방대한 사론을 싣고 있다. 구편(舊編)과 신편(新編)의 사론과 함께 성종조 당대까지의 모든 관찬사서의 사론을 모두 수합하여 정리하였기 때문에3), 기존의 그 어떤 사서보다도 분량이 방대하다. 여기에 『동국통감』 수찬자들의 사관이 담긴 사상까지 풍부히 싣고 있어, 당대의 역사관을 파악할 수 있을뿐더러, 이전 사료에 대한 사론에 대한 역사인식의 시대적 변천을 파악할 여지마저 제공한다. 『동국통감』이전의 현존하는 어떤 사서도 이처럼 구성되어 있는 책은 없다. 따라서 『동국통감』의 편찬 과정과 편찬 의도, 그리고 사론의 성격을 규명한다면 조선 초기 사림들이 역사관을 파악할 수 있으며, 아울러 훈구와 사림의 교체기 속에서 편찬된 『동국통감』을 통해 조선 개국 이후 성종조까지 편찬된 여러 사서들에 대한 사관이 어떠하였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4)
2. 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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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편찬 과정
(세조 4년)부터 국왕 관할하에 시작되었다. 세조는 『동국통감』을 삼국사와 고려사를 정리한 편년체 사서로서 정리하고자 하였는데, 『삼국사기』와 『고려사』에서 빠진 부분을 여러 사서를 통해 참고한 다음, 올바르게 체계화하여 편년체 형식에 맞춰 서술하고자 하였다.
이 중에서 세조가 특별히 관심을 보인 부분은 『고려사』보다 『삼국사기』였다. 『삼국사기』와 당시에 저술되었던 『동국사략』에서 삼국 이전의 상고사에 관해 설명이 많은 부분 빠져 있었는데 이러한 부분을 특히 수정하여 정리하고자 노력하였다.12) 따라서 세조는 1457년(세조 3년)에 전국의 모든 지방 수령에게 명령하여 은닉된 비기(秘記)와 참서(讖書)를 수합하도록 명령하였고, 이 과정에서 민간 신앙이나 도교, 풍수 사상 등 상고사와 고기(古記)류에 해당되는 자료들이 수합되었다. 그는 신라를 강조한 『삼국사기』나 『동국사략』의 역사 체계를 부정하였는데, 단군 신화와 같은 고기를 통해 민족적 자아를 발견하여 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단군 신앙을 주장하였으며, 아울러 세조의 집권 과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집권을 합리화하는데 주력하였다.13) 결국 세조는 문종과 단종과 같은 왕조를 걸쳐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 부국강병책을 실시하여 세조의 입장을 회복하는데 목적을 둔 것이다.
2.3. 편찬 과정
『동국통감』은 1458년(세조 4년) 4월에 세조의 명령하에 편찬 작업이 시작되었지만, 편찬 과정이 순탄치 못해 성종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세조 만년에 이를수록 세조가 가장 두려워하던 주자(朱子)의 강목법 역사서에 편향되어 서술되었고, 심지어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한 서술 방식으로 서술이 진행되었다. 이는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경우 후세에 왕위 찬탈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될 세조의 입장에 정면적으로 도전되는 방식이었으므로 『동국통감』의 원래 편찬 의도에 어긋나게 서술되고 있었다. 또한 『동국통감』의 편찬을 맡은 동국통감청(東國通鑑廳)의 관리의 의견 대립으로 신하가 하옥되었고, 이시애의 난(14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