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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공산주의자 그룹과 혁명적 대중조직운동(1931년-1937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사회주의자들의 방침은 1931년 말부터 변화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한 계기는 이 해 9월에 일어난 만주사변에 의해 주어졌다. 애초에 사회주의자들은 만주사변과 그에 따른 ‘제2차 제국주의 세계 대전’이 조선 혁명의 기회가 될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만주사변은 사회주의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괴뢰 만주국의 건립, 곧 일제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제의 지배 체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따라서 빠른 시간 안에 조선 혁명을 이룰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빨리 당 조직을 꾸려야 한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의 계기는 1932년 초부터 대중 투쟁이 급격하게 퇴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동자의 동맹 파업 건수, 농민의 소작 쟁의 건수, 학생의 동맹 휴학 건수가 모두 1931년을 정점으로 1932년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또한 1932년 이후에는 파업투쟁의 규모나 전투성도 점차 줄어들었다. 또한 대규모 농민 폭동도 함경도의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대중투쟁의 고조가 당 재건과 조선 혁명에 직결될 것이라는 기대도 점차 비현실적인 것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코민테른은 1931년 말 이른바 ‘신지도 이론’을 통해서 모든 재건운동세력은 혁명적 대중조직의 건설을 당 재건운동의 출발로 삼을 것, 혁명적 대중조직 안에서 획득된 전위적 활동가로 구성되는 공산주의자 그룹을 당 재건의 매개 조직으로 할 것, 공산주의자 그룹은 횡적으로 연락하지 말고 활동 상황을 직접 코민테른에 보고할 것, 이 과정에서 당 재건의 토대가 확립되었을 때 코민테른이 파견한 전권 위원의 주도 아래 그룹 대표자 회의를 열어 당을 재건할 것 등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자들은 새로운 조직 노선을 채택했다. 새로운 노선의 핵심은 사회주…
직의 강화라는 방침에 따라 대중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 결과 사회주의 운동의 대중적 토대와 영향력이 확대되었고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배출되었다.
이러한 조직 노선의 변화와 함께 생산 현장의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이전 시기의 계급 대 계급 전술을 극복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보기를 들자면,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이재유 그룹의 경우, 1935년 초까지는 민족 부르주아지, 민족개량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를 모두 적대 세력으로 간주한 데 비해서 1936년 초를 전후로는 인텔리를 포함한 소부르주아지에 대한 적극적인 포섭 정책을 채택했다. 여기에는 1935년 7월부터 8월까지 열린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채택된 반제 민족통일전선 방침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1930년대 초반에 이미 지역의 사회주의 활동가들 사이에서 조선 혁명의 기본 성격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대표적인 혁명적 농민 조합 가운데 하나인 정평농민조합이 1931년 초 일제의 탄압에 의해 와해되자 정평의 활동가들은 곧 재건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1931년 11월과 1932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당면 운동의 목적을 계급운동과 민족해방의 결합에 둘 것인가 아니면 계급운동에만 둘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노선 투쟁이 벌어졌다. 일부 활동가들은 “공산주의 사회 건설만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를 만들 것”을 주장한 반면에 일부 활동가들은 “조선을 독립시켜 국체를 변혁하고 조선에서의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를 만들 것”을 주장했다. 아마도 이러한 노선 투쟁의 배경에는 혁명의 기본 역량을 어떻게 짤 것인가에 대한 문제 의식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논쟁에서 전자의 입장을 견지하던 이재필(李在弼)이 이후 정평농민조합 재건운동의 최고 지도자가 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정평에서는 1932년 무렵부터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의 결합이라는 노선이 관철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