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9세기 사회변동과 동학사상
Ⅰ. 외압과 자주의 갈등
조선의 19세기는 서양제국주의 침략으로 대외적 위기가 고조되던 시기였다. 조선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서양 열강이 몰고 온 군함과 함포소리에 화이론적 세계관에서 깨어나기 시작하였다. 아편전쟁이라고 불리는 제1차 중영전쟁(1839~1842)이 동아시아의 화이론적 체제를 무너뜨리는 첫 사건이었다. 제1차 중영전쟁은 중국과 영국의 외교?경제?군사적 대결이었을 뿐 아니라 동방세계와 서방세계의 문화적?사상적 격돌을 의미하였다.
1856년에 애로호사건으로 발발한 제2차 중영전쟁은 영불연합군이 중화의 본거지인 북경을 점령함으로써 화이론적 체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붕괴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조선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주변국가에게 서세동점의 냉엄한 국제현실을 인식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상과 같이 19세기 조선을 둘러싼 대외 정세는 서양 열강에 의해 전통적인 화이론적 체제가 붕괴되는 가운데, 조선을 둘러싼 중국의 동아시아 패권유지욕과 일본의 대륙팽창욕이 부딪치면서 위기가 한층 고조되고 있었다. 특히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청?일 양국의 대결은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일전쟁 등으로 이어지면서 조선의 대외적 위기를 부채질 하였다
Ⅱ. 정치?경제?사회적 변동
19세기 조선왕조 지배체제는 대외적 위기가 가중되는 속에서 내부적으로 여러 측면에서 균열되고 있었다. 우선 수백 년간 통치이데올로기로 기능해 왔던 주자학이 경직화되거나 공소화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유교이념 아래 왕권과 신권의 세력균형을 이루어 오던 중앙정치는 차츰 그 균형이 깨지고, 신권이 비대해지는 경향을 보이면서 기형적인 정치형태인 이른바 세도정치를 출현시켰다. 세도라는 와실외척 …
Ⅲ. 민중의식의 발전과 동학의 창도
860년 농촌사회는 봉건사회의 모순과 농민층분화로 그 안정적 기초가 뒤흔들리고 있었다. 최제우에게도 이런 농촌현실이 그대로 보였고, 자신도 급속히 몰락해 가는 양반 집의 서자로서 그들과 함께 역사의 뒤켠으로 밀려가는 데 예외일 수 없었다. 혼란한 사회를 개혁해야 할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들은 허송세월만 하고 있었고, 이런 틈을 타 사회일각에서는 서학(西學)이 기층민의 호응을 얻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서학을 하나의 사상적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구도에 들어갔다. 최제우는 당시 기층민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여러 사상들을 정리한 후 자신의 세계관을 확립하였다. 즉 『주역』의 선후천 순환논리를 받아들여 자신이 지은 「검가」(劒歌)에서 5만 년의 시운으로써 후천이 열린다고 확신하였다. 다음 그는 당시 기층민 사이에 뿌리내리고 있던 도참사상을 받아들였고, 장생불사 신선사상도 흡수하였다.
위와 같이 여러 민중사상을 흡수하는 가운데 동학이 완성되었고, 이때 동학은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이나, 학(學)은 동학(東學)이다…… 운(運)은 하나이고 도는 같으나 이치는 다르다??(「논학문」, 『동경대전』)고 논파한 대로 서학에 대응하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동학은 여러 사상의 단순한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학은 크게 두 가지의 사상적 내용을 골격으로 하고 있었다. 첫째는 기일원론적 우주관 속에서 하날님을 바로 자기와 일체화시킨 인간관 제시이다. 이런 기론(氣論)에 바탕한 인간관은 그 지극한 기를 자신의 정성에 따라 내 몸속에 영원히 모실 수 있는(侍天主), 그리하여 하날님과 하나가 되는 이른바 인내천(人乃天)사상의 초기의 모습이었다. 둘째는 무위이화(無爲而化)의 조화 속에서 천도운행에 따른 선후천 순환운동론 확립이다. 무위이화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그리하여 그 조화가 이미 정해져 있는 부분이다(造化定).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현재의 부자와 가난한 자가 후천에서는 역전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