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죽산 조봉암(1899~1959)
Ⅰ. 서론
왜 조봉암 인가?
-‘한국정치의 이해’ 수업을 듣기 전까지 조봉암이란 인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해서는 대통령까지 한 인물이라 교과서에서, 그리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전공이 행정학 이여서 리더십이나 한국정부론 등의 수업에서도 많이 접해본 인물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만 보아오던 이 두 인물은 대단한 인물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대학에 들어와서 그래도 어느 정도 이 두 인물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눈이 생기게 되었고 암울한 한국정치역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한국정치를 개인의 권력욕구로 좌지우지하고 있던 시절, 이들에 대항에 한국정치를 바르게 바꾸어보려고 했던 인물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이 수업을 들으면서 조봉암이란 인물에 대해 알게 되었다. 교수님께서 조봉암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을 보면서 조봉암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서적과 여러 자료들로부터 조봉암에 대해 알게되면서, 훌륭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될수록 한국정치에서 그를 잃은 안타까움은 커져갔다. 자료를 조사하면서 1940ㆍ50년대의 한국정치는 조봉암이란 인물을 제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는 시기였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봉암은 40년 가까이 역사 속에 숨겨져 있었다. 그것이 과거 한국정치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90년대에 들어와서야 조봉암이란 이름을 언급할 수 있게 되고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1919년 3ㆍ1운동 이후 독립운동으로 그리고 혁신적인 정치활동으로 한국역사와 함께 한 조봉암은 간첩누명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이제 그를 알고 연구할 수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그를 되새기고 재조명하…
Ⅱ. 본론
1. 조봉암 연보
1899년(1세) 9월25일 경기도 강화군에서 출생.
12월22일 진보당 창
내용의 대부분은 조공의 정책과 활동을 비판.
5월14일 민전 인천지부 의장직 사임.
6월11일~22일 인천 미군방첩부대에 연행되었다 풀려남.
6월23일 인천시민대회장에 「성명서」배포.
8월22일 기자회견으로 반공노선 천명.
10월30일 미군사령관 하지와의 회견.
1947년(49세) 2월 민주주의독립전선 조직.―건민회, 통일건국회, 근로대중당,
한국농민총연맹, 조선어학회 등 29개 단체가 참여.
5월28일 독립전선 주도로 `미소공위대책 각정당사회단체협의회`
(약칭`공위대책협 의회`)가결성되고조봉암은 특별정치위원회 공동부의장에 선임.
1948년(50세) 5월10일 단독선거에 참가, 제헌 국회의원 당선.
6월1일 제1회 국회 본회의에서 헌법기초위원으로 선임.
8월2일 이승만에 의해 초대 농림부장관에 임명됨.
1949년(51세) 2월22일 관사수리비 유용 혐의로 농림부장관 사직.
1950년(52세) 5월30일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
6월19일 장택상과 함께 국회부의장으로 선출됨
(이후 1952년7월10일 재선되어 1954 년5월까지 국회부의장으로 활동)
1952년(54세) 8월5일 제2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 2위로 낙선.
1954년(56세) 3월 우리의 당면과업 저술.
5월20일 당국의 방해로 제3대 국회의원선거 후보등록 실패
1955년(57세) 2월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겠다는 성명 발표(결국 참여 못함)
9월1일 혁신계, 진보세력의 광릉회합.
12월22일 진보당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