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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말여초 혼란기. 후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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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신라하대사회의 동요 진골귀족의 분열 역대군주들은 권력집중을 목표로 한다. 물론 중대에는 집사부를 중심으로 권력을 집중시키는 등 전제적 왕권체제였다. 이 권력구조가 骨品制度(골품제도)에 토대를 두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경덕왕을 국왕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관료제도를 양성시키기 위해 국학(國學)의 진흥에 주력하였다. 진덕여왕5년(551)에 설치된 국학은 진골귀족보다는 하급귀족, 즉 6두품이 가장 흥미를 보였기에 그간 큰 발전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경덕왕`혜공왕은 국왕에 대한 큰 관심을 보였다. 어쩌면 국학의 辛學때에는 문묘에서 釋奠祭(석전제)를 거행했을 개연성이 크다. 여러 가지의 경덕왕의 개혁정책은 진골귀족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진골귀족과의 권력투쟁에 지칠대로 지친 경덕왕은 만년에 의욕을 잃고 宴樂(연악)에 탐닉했다. 그 결과 왕의 정치개혁을 지지하던 측근의 충신들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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