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 제국이 조선을 침략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인 명성황후 민씨가 경복궁(景福宮)에서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지휘하는 일본 낭인 등에게 시해된 사건이다. 명성황후 시해참변 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고도 부르며, 당시에는 을미년의 변(乙未之變) 또는 을미년 팔월의 변(乙未八月之變)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때의 암호명은 `여우사냥`이었다.
그동안 일본은 조선의 분쟁으로 일어난 일본 낭인들이 개입한 사건이라고 주장했지만, 2005년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가 을미사변 사건 두 달 뒤에 작성한 일본 천황이 결재한 보고서가 공개되었다
준비과정
을미사변은 미우라 일파가 저질렀지만, 그동안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진정한 주동자는 미우라에 앞서 공사를 지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비롯한 일본 정치의 최고 원로(元老 : 겐로)[4][5] 및 이토 히로부미 총리를 비롯한 각료였다.[6] 당시 을미사변 실행자들이 일본 정부의 실권자인 원로들에게 보호 받았는지는 그들의 사후 출세 가도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심지어 미우라는 재판을 받고 석방되자 일본 메이지 천황이 직접 시종을 보내 치하하기까지 했다.
한편 사건의 실행자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당시의 목격자인 궁녀, 환관, 태자 이척 등이 증언한다. 또한 러시아인 건축기사 세레딘 사바틴(Середин-Cабатин, 士巴津, Sabatin, 흔히 사바틴)과 시위대 교관인 미국인 다이(W. M. Dye) 대령이 현장을 목격하였고, 범인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서양 각국에 알려졌다. 일본은 기록을 조작하여 황후 살해 책임을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에게 돌리려 했다.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준비[편집]을미사변은 매우 치밀하게 준비되었는데, 기본적으로 당근과 채찍을 준비하였다. 당근으로는 왕실을 회유 혹은 매수하여 반일 감정을 누그…(생략)
|
출신이 많았고, 심지어 동경제국대학 출신도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직업적 정치깡패가 아니라 고도로 의식화된 지식인 테러리스트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날 모의에 참여한 사람은 일등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杉村 濬)와 궁내부 및 군부 고문관으로서 평소 흥선대원군과 친분이 두터운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 柳之助) 대위, 영사관보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 九萬一), 그리고 공사관 무관이자 포병 중좌인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瀨 幸彦)였다. 그밖에 직원에게는 비밀 유지를 위해 일체 알리지 않았다. 우치다 사다쓰치(田 定侈) 일등영사도 이 모의에서 빠졌다.
당시 논의한 내용은, 첫째 시해의 주역은 일본 낭인이 맡고, 외관상으로는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의 반란으로 꾸민다. 이 일은 청일전쟁 직후 갑오경장 때 일본 군인의 궁궐 점령을 지휘한 오카모토에게 맡겨졌다. 둘째 일본인 가담자는 낭인 자객, 일본 수비대 군인, 일본 공사관 순사로 구성한다. 이때 낭인 자객은 한양에서 발행하는 일본인 신문인(新聞人),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가 맡았다. 규슈와 구마모토 현 출신 낭인 30여 명과 한성신보 주필 구니토모 시게아키, 편집장 고바야가와 히데오, 기자 히라야마 이와히코, 사사키 마사유키, 기쿠치 겐조 등의 민간인이 참여하였다. 이러한 민간인의 참여는 일이 세상에 알려지더라도 공사관이나 일본 정부의 입장을 유리하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비중이 컸다. 셋째 일본 수비대와 순사, 조선인 훈련대를 움직이는 일은 일본 공사관 소관이다. 그래서 황후 시해에 구스노세 유키히코 등이 참여한다. 넷째 거사일은 10월 10일 새벽으로 한다.
미우라는 황후 시해를 위한 음모를 “여우사냥”이라고 불렀으며, 예상보다 일찍 훈련대가 해산되자 거사 일시를 10월 8일 새벽 4시로 앞당기게 된다. 그러나 바뀐 계획도 차질이 생긴다. 새벽 4시에 작전을 끝내려면 늦어도 새벽 3시까지는 흥선대원군과 흉도들이 경복궁에 진입해야 한다. 그러나 대원군이 공덕리 별장을 떠난 때는 새벽 3시였고, 경복궁에 도착한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