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독섬이라고도 하며, 면적은 18만 7,554㎡이다.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87.4㎞ 떨어진 해상에 있으며, 동도(東島)서도(西島) 및 그 주변에 흩어져 있는 89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화산섬이다. 동도는 동경 131도 52분 10.4초, 북위 37도 14분 26.8초에, 서도는 동경 131도 51분 54.6초, 북위 37도 14분 30.6초에 위치한다. 동도서도간 거리는 151m로 좁은 수도(水道)를 이룬다. 동도는 해발고도 98.6m, 면적 73,297㎡이고, 서도는 해발고도 168.5m, 면적 88,740㎡이다.
옛날에는 삼봉도(三峰島)가지도(可支島)우산도(于山島) 등으로도 일컬어졌다. 울릉도가 개척될 때 입주한 주민들이 처음에는 돌섬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돍섬으로 변하였다가 다시 독섬으로 변하였고, 독섬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독도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프랑스와 유럽 같은 나라에서는 독도를 발견한 배의 이름을 따서 `리앙쿠르(Liancourt)`, `호넷(Hornet)`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독도의 역사
독도의 명칭은 일찍부터 기록에 오르내린 울릉도와 관련지어 살펴보아야 한다. 본토 유민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울릉도의 옛이름인 우산국이 신라에 귀속된 것은 6세기 초(512) 였다.
이 사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512)년에 `6월에 우산국이 신라에 속했다`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울릉도라는 명칭이 정착됨에 따라 그 부속 도서인 독도로 우산이라는 명칭이 이동하게 되었다.
조선 1454년 (세종 14)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 강원도 울진현조에서도 `우산, 무릉 두 섬이 (울진)현 정동(正東) 바다 한가운데 있다`하여 동해 상에 무릉과 우산의 두 섬이 있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1530년 (중종 26)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울진현조에 `우산도, 울릉도가 현의 정동 바다 한 가운데 있다`하여 `세…(생략)
1. 인물로 본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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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국을 복속시킨 이사부는 541년(진흥왕 2) 병부령(丙部令)이 되어 562년까지 실권을 장악하며 동서남북으로 신라의 지배권을 확대하는 일에 크게 공헌하였다.
우산국은 지금의 울릉도를 중심으로 주변의 부속도서들을 세력권 내에 두었던 소국 (小國)이었으며, 우산국의 영역에 대해『만기요람』군정편에는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의 땅이며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松島(독도)라고 하여 독도가 우산국의 영토였음을 문헌이 명료하게 증명하고 있다.
안용복은 조선의 어부로 숙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숙종 19년(1693) 박어둔 이하 십여 명과 함께 울릉도에서 어로 및 농사 활동을 하던 중 일본의 오오야(大谷) 집안의 어부들과 충돌하여 일본 오키섬까지 납치당하게 된다. 오키도주는 안용복 일행을 돗토리성(鳥取城)의 호키슈(伯耆州) 태수에게 이송하게 되며, 안용복은 호키슈 태수 앞에서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강조하며 일본인들의 출어를 금지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호키슈 태수는 이를 에도막부에 보고하고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鬱陵島非日本界)`라는 서계를 써주어 안용복 일행을 나가사키ㆍ대마도를 거쳐 조선으로 돌려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안용복이 대마도에 이르자 대마도주는 에도막부의 관백(집정관)이 안용복에게 써준 서계를 빼앗고, 조선의 동래부에 인계하였다.
이후 안용복이 숙종 22년(1696) 봄에 해산물 채취를 나갔다가 또다시 일본어선들이 울릉도에서 어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즉시 그들을 쫓아 내고,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항의하기 위하여 재차 돗토리번으로 건너갔다. 다시 돗토리번주 앞에 선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땅임을 명확히 하고, 일본인들의 계속되는 침범을 근절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에 돗토리번주는 `두 섬이 이미 당신네 나라에 속한 이상(兩島旣屬國), 만일 다시 국경을 넘어 침범하는 자가 있으면 국서를 작성하고 역관을 정하여 무겁게 처벌할 것이다.` 라고 하여, 에도막부의 결정사항을 전했다.
이와 같은 안용복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