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단지 “살아남아야 한다.”라는 일념, 오직 그뿐. 옆에서 적의 포탄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동료를 목격한 자의 삶에 대한 열망은 어느새 적에 대한 격렬한 분노와 증오로 치환되고, 그런 그의 손에 피를 흘리게 될 다른 누군가의 분노와 증오를 확대재생산 한다. 그리고 나면 이곳에 남는 것은? 오직 들끓는 증오와 분노, 죽은 자의 주검 앞에 선 살아남은 자의 무심한 눈빛. 전쟁은 인간성을 말살시킨다.

피카소의 그림을 본다. 좌측에는 발가벗겨진 여성과 아이들로 표상되는 피해자들의 모습. 그리고 우측에는 총과 칼을 겨눈, 철로 된 가면을 쓴 군인인 남성으로 표상되는 가해자들의 모습. 양쪽 모두가 누군가의 아들이자 딸이며, 또한 아버지이며 어머니 그리고 누군가의 배우자일 것이다. 어쩌면 여인들과 아이들은 적의 아내와 아들, 딸일지도 모른다! 그들을 살려두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직접적인 전투능력이 없는 이들을 그냥 놓아두는 것이 옳은가? 이들을 살려줌으로써 언젠가 내가 죽게 되지는 않을까? 적들도 내 아내와 아이들을 처참하게 학살했으니 나도 복수하리라? 철가면 아래에 가려진 군인들의 표정은 알 수 없다. 피카소는 군인의 얼굴을 직접 드러내는 대신, 그들에게 ‘가면’을 씌웠다. 아마도 그들 중 그 누구도 앞서서 민간인을 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군인이고, 군인에게 명령은 그것이 불합리하고 모순적일지라도 행해야만 하는, ‘까라면 까’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학살자가 되어버린 이들. 이들의 무의식과 의식에 가해진 ‘살인의 추억’들. 과연 이들이 가해자인가? 아니면 또 다른 피해자인가?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 아도 죽이라는 명령에 방아쇠를 당기고, 또한 살기 위해서는 ‘적을 쏴 죽여야만 하’는 전쟁의 참상. 왜 싸우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피가 튀고 살이 튀는 전쟁터에 던져진 이들. 이들을 과연 가해자로만 몰아버릴 수 있는가? 대체 누가 그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나? 어째서 이들이 죄악을 저지르지 않으면 안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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