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교육제도와 관료
발표를 시작하기 앞서 조선시대에는 각자의 신분에 따라 그들이 받을 수 있는 교육에 차이점이 있었으며 그들이 장차 얻을 관료직에 있어서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우선 신분제도를 알아보고자 한다.
과거제도에 가문과 지방의 차별은 없으나, 관직과 분관(分館)등의 급제자 진출에 문벌과 지방의 차별이 반영되었다.
1. 서울 양반: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이나 문한을 담당하는 홍문관 등 이른바 청요직으로 이곳의 관원이 된 사람은 재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순탄하였다. 무과의 경우는 왕을 호종 하는 선전관에 소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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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평안도,함경도 등의 서북 사람 : 지방 차별에 있어서 가장 차별을 받아 문과 합격자도 성균관에 임용될 뿐 청요직에 나가지 못하였고, 고관으로 등용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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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인 : 문과에 합격하면 승진이 어려운 교서관에 임용하여 책을 출판하는 일에만 종사하였다. 무과의 경우는 궁궐이나 성문을 지키는 수문청에 소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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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얼: 양반의 자손 가운데 첩의 소생을 이르는 말. 문과 응시자체가 금지되고, 오직 전문기술관이 될 수 있는 잡과응시만이 허용
조선의 교육제도
성균관
1. 성균관
1)의의 및 특징
조선시대 최고의 고등 교육기관으로써 국학, 태학, 국자감, 반궁, 현관 등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성균관은 태조 7년 (1398년)에 정도전이 유교적 가치를 바탕으로 폭넓은 학식과 인품을 갖춘 고급관리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건립한 국립 최고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성균관은 국가에 의해 관리되는 관학에 속했으며, 향교가 과도한 설립과 퇴폐로 인해 몰락을 맞게 된 반면 국가차원의 집중적인 관리와 육성으로 그것이 지닌 중요한 역할을 조선시대 내내 행할 수 있었다.
2)입학방법
성균관의 입학 자…(생략)
3)교육내용
(1)의의 및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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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자는 붓글씨를 연습하는 것이었다.
?(4)평가방법
성균관의 평가는 정기 평가와 수시 평가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정기 평가는 규정에 의거하여 학습 일정에 따라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평가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매일 추첨을 해서 유생이 읽은 내용을 강독하게 하고[日考], 10일마다 제술할 과제를 주어서 시험을 보고[旬考], 예조의 당상관은 매월 한 차례씩 강하여 고시[月考]”하였다. 각 평가의 결과는 성적부에 기록하여 두었다가 연말에 성적이 우수한 자는 상부에 보고하여 관리로 등용
하거나 과거시험의 일부를 면제해 주었다.
수시 평가는 성균관 유생들의 학업을 독려하기 위해 수시로 평가하는 것인데, 대개는 관내 행사와 연결하여 평가하였다. 평가 결과에 따라 과거시험의 일부를 면제해 주는 특전을 주어 사기를 진작시켰고, 일부는 평가 자체가 과거시험이기도 하였다. 전강(殿講), 통독(通讀), 합제(合製), 알성시(謁聖試), 관시(館試), 도기과(到記科), 절제(節製), 황감제(黃柑製) 등을 사례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성균관에서의 학업은 재학 기간에 상관없이 과거에 합격하면 종료되었기 때문에 유생들은 과거 합격을 위해 휴대용 학습서라고 할 수 있는 죽첩경서(竹牒經書)를 가지고 다니면서 틈나는 대로 경서의 내용을 암송하였다. 한편 깊이 있게 경서를 읽거나 제술을 하기보다는 과거시험에 나올 만한 문제와 모범답안을 모아 엮은 초집(抄集)을 가지고 공부하는 부정적인 학습 풍토가 만연하기도 하였다.
(5)졸업후진로?
성균관 졸업 후 대과시험을 치러 그 결과에 따라 관직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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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
(1)의의 및 특징
유학의 이념을 연구하고 유학적 소양을 갖춘 선비들을 양성하기 위해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설립한 중등관학교육기관으로써 서울에 설치되었다. 사학은 그 규모나 교육수준에 있어서 성균관보다 격이 낮았으나 국가의 재정적 지원에 힘입어 상당한 교육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유명무실해져 교육적인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