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
( 조선시대 농경중심의 과학기술 및 동서양의 수차의 발달 응용조사와 세종의 수차장려 조사분석 )
목 차
▶ 서 론
ⅰ) 조선시대의 농경중심의 과학기술
- 자격루, 양구일구, 측우기, 양수표, 양전산계법
- 수차를 이용해서 동력을 만들어 냄
▶ 본 론
ⅰ) 수차의 기원
ⅱ) 동서양의 수차발달
- 서양에서의 수차의 발달 및 응용
- 동양에서의 수차의 발달 및 응용
- 동?서양의 수차의 발달 차이
ⅲ) 세종대왕의 수차 보급
- 세종의 위민에 입각한 수차 보급
- 세종의 수차 보급에 관한 노력
▶ 결 론
- 세종의 수차 장려에 대한 나의 견해
[서론]
조선이라는 나라는 태조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나라를 건국하였기에 그 초기에는 혁명세력들과의 사이에서 왕권강화에 힘을 다하였고 더불어 새로운 왕조의 창건사업이 발달하면서 여러 분야의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는 시대였다. 특히 농경중심의 사회라는 점에서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농학에 중점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래서 농업에 관련된 천문 ·기상 ·역법 ·측량 ·수학의 발달을 가져왔고, 그리하여 천체 ·시간 ·기상 ·토지의 정확한 측정을 위한 각종 기구가 발명 ·제작되었다. 천체관측기구로서 1433년(37세 세종15년)에는 혼천의를 제작하고, 1434년(38세 세종16년)에는 시간측정기구인 앙부일구(해시계) ·자격루 등이 만들어졌는데, 그 성능이 매우 우수하였다. 특히, 1441년(45세 세종23년) 8월에는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제작하여 이듬해 5월에 측우하는 제도를 정하여 전국 각지의 강수량을 과학적으로 측정하였다. 그리고 강이나 저수지 따위의 수위를 재기 위하여 양수표를 만들어서 농경에 효율적으로 적용시켰다. 세종실록에 아래와 같이 기록이 남아있다.
『 호조에서 아뢰기를,
“각도 감사(監司)가 우량(雨量)을 전보(轉報)하도록 이미 성법(成法)이 있사오니…(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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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퍼 돌려 전답에 대는 자가 있기에, 학생(學生) 김신(金愼)으로 하여금 그 수차를 만든 법을 살펴보게 하였더니, 그 수차가 물을 타고 저절로 회전하면서 물을 퍼 올려 대고 있어, 우리 나라에서 전년에 만들었던 수차인 인력(人力)으로 물을 대는 것과는 다른데, 다만 물살이 센 곳에는 설치할 만하오나, 물살이 느린 곳에는 설치할 수가 없습니다. 수침(水砧)도 또한 그러하였으니, 신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비록 물살이 느리더라도 사람이 발로 밟아서 물을 올린다면 또한 물을 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제 간략하게 그 모형을 만들어 바치오니, 청컨대 각 고을에 설치할 만한 곳에 이 모형에 따라 제작하여 관개(灌漑)의 편리에 돕도록 하소서. 』
세종 52권, 13년( 1431 신해 / 명 선덕(宣德) 6년) 6월 3일 을미 4번째기사박서생의 건의에 따라 수차를 만들어 시험하게 하다
『 공조 참의 박서생(朴瑞生)이 말씀을 올리기를,
“지난번 일본에 사명을 받들고 가서 물레방아를 보고, 그것이 인력(人力)이 없어도 스스로 돌아가는 것을 좋아하여 학생 김신(金愼)으로 하여금 관개차(灌漑車)를 가서 살펴보게 하였더니, 역시 인력이 없이 스스로 물을 푸게 되므로, 돌아오는 날에 그 모형을 만들어 올려서, 전하의 근본을 힘쓰고 민생을 후하게 하옵시는 정책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더니, 곧 공인에게 명을 내려 제조해 시험하게 하시니, 그 관개하기 쉬움이 중국의 수차보다 우수하옵니다. -(이하생략) 』
위의 세종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수차가 인력없이 스스로 물을 푸게 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즉, 인력이 아닌 제 3의 물체에서 동력을 끌어다가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과학적으로는 자연의 원리중 하나를 발견하고 실용화 시켰다는 점에서 공학적인 노력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직접 창안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에서 선진과학기술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조선의 인식이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야만인의 나라로 조선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