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인터내셔널과 사회주의
1. 들어가며
제 1인터내셔널이 1876년에 아메리카에서 불명예스럽게 생명을 다한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창설할 것을 제의하는 데 별다른 열성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인터내셔널이 창설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우선 主義상으로 일관성있고 굳건하게 조직된 政黨들이 유럽의 중요한 나라들에서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믿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들은 게드와 하인드만이 주도한 조직은 말할 것도 없고 1870년대 후기와 1880년대에 특별한 주목을 받으며 등장하기 시작한 외형상의 마르크스주의적 組織들과 SPD마저도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보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의 지도자들과 社會主義행동주의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국제적 조직의 필요성과 증대된 그들 계층에게 국제적 지도력이 요구된다는 인식이 점증했다. 마르크스가 타계한 1880년대 말에 이르러 창립총회에 대한 다양한 제안들이 끈질기게 제시되었다. 게드주의자들과 브루스주의자들은 이 문제에서도 특별히 심한 차이점을 노정했다. 그러나 제 2 인터네내셔널의 여타 잠재적 회원들 사이에서도 폭 넓은 異見이 존재했다. SPD의 지도자들과 英國에서 조직된 <노동조합 總協議會>(TUC) 사이의 異見이 가장 현저했는데 전자는 정치적 조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후자는 노동조합 조직을 강조했다. 단결을 도모해야 할 어떤 국제적 노동자 조직도 낡은 분파주의에 의해 무력하게 될 것 같이 보였다.
2. 제2인터내셔널 창립 총회
프랑스인들에 있어서 프랑스혁명의 100주년이 되는 해인 1889년에 파리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한다고 하는 아이디어는 분명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게드주의자들과 브루스주의자들은 대립적인 회의를 조직하여 바스티유의 습격일로서 국경일인 7월 14일에 집회하였다. 혼란과 적지 않은 원한이 있은 후 게드측의 총회가 둘중 더 매력적이고 영속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것이 결국은 <新國際勞動者同盟…(생략)
3. 제2인터내셔널과 무정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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議事 문제는 대개 느슨하고 융통성있는 형태로 다루어졌고 (후일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강령에 관계되는 결의안들이 투표에 붙여지는 한, 대개 그것들은 성격상 관대하고 비논쟁적으로 통과 되었다.
그것은 비록 외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의 회합, 혹은 좀 더 호의적으로 말해 “개혁가”란 이름을 거부한 사람들의 모임이었지만 대개의 경우 통과된 결의들은 즉각적이고 폭력적인 혁명행위보다는 긴 기간에 걸친 평화적 성취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들이었다. 예컨대 8시간제 및 기타의 노동자 보호 입법에 대한 요구는 분명히 기존의 자본주의 국가 아래서도 성취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3. 제2인터내셔널과 무정부주의
즉각적인 대립투쟁을 회피하는 입장을 의미하는 그러한 경향은 혁명적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총회에서 조롱을 당하였는데, 1880년대에 널리 알려진 그들의 이미지는 점증하는 정치적 암살, 폭탄투척, 기타 무정부주의적 테러 등으로 특징지어졌다. <제 2인터내셔널>의 다수의, 특히 마르크스주의자중의 지도적 인물들은 그들의, 새로운 조직이 참다운 진보를 계속할 수 있기 전에, 무정부주의자들을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믿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의 무책임하고 잔인한 행위는, 이들 지도적 인사들이 보았던 바와 같이 社會主義운동을 불신, 혼란시킴으로써 敵들에게 공격의 구실을 주었던 것이다.
어떤 과격한 무정부주의자의 대표도 <인터내셔널>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출석한 무정부주의자들은 계속적으로 곤란과 고통을 주는 원천이었다. 그들은 반복하여, 꺼리낌 없이 국제 社會主義운동의 지도적 인물들, 특히 獨逸人들을, 참다운 국제적 감정이 결여된 거짓 혁명가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베벨(August Bebel)은 1893년 쭈리히의 인터내셔널 집회에서 회원자격을 정치적 행동을 받아들인 集團과 政黨에 제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1896년의 런던 회의에서는 무정부주의자들을 축출하는 또 다른 조처가 취해졌다.
<인터내셔널>에서 이와 같은 무정부주의자와의 공동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