甄萱의 리더십
Ⅰ.서 론
경제전문가의 절반이상이 국내 경기회복이 지연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으로 "불투명한 정부 정책과 리더십 부재"를 꼽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경제 리더십 평가는 100점 만점에 36.7점을 받았다. 서강대 경제연구소와 사단법인 오피니언리더스 클럽(OLC)이 서강대 경제대학원의 오피니언리더스 프로그램(OLP)회원 기업인 64명, 경제부처 관련 언론인 58명 등 12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 10명중 6명이 "현 정부의 불투명한 정책과 리더쉽 부재"가 경기 회복을 지연시키고 있는 가장 큰 요인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이번 조사 결과 참여정부 집권 전반기의 경제정책 평가에서 응답자의 80%가 "불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경제문제 해결을 위한 노무현 대통령의 리더십을 100점 만점에 몇 점으로 평가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선 평균 36.7점을 주었다. 이는 지난 1월에 실시했던 같은 설문조사에서 4.15점이 나왔던 것과 비교할 때 6개월만에 4.8점 내려간 것이다.
현제 우리나라의 리더인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한 설문조사의 결과이다. 참여 정부의 슬로건 아래 시작된 노무현 정부가 경제적 문제에 관해서는 아직까진 만족스럽지 못한 점수를 보여주고 있다. 이에 견훤의 출생과 후백제 건국 과정 그리고 이후의 행보를 살펴보면서 견훤의 리더쉽과 관련 성과와 한계를 짚어보고자 한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이 직면한 상황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기술하고자 한다.
Ⅱ.본 론
1. 견훤의 리더쉽과 그 성과
사실 견훤의 리더쉽이 처음 위력을 발휘한 것은 그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신라의 무관으로서 삶을 선택받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견훤의 아버지는 현재 경상북도 상주 지역에서 부농(富農)으로 가업을 일으켜 골품제도가 엄격히 적용이 되지 않는 사회적 혼란기를 틈타 지방호족과 같은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는 아들을 중앙 정부의 무관으로 만들면서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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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력이 부각되는 것은 신라 경애왕 축출 작전에서 볼 수 있다. 당시 고려, 후백재, 신라는 어느 두쪽이 연합할 경우 남은 한쪽이 심각한 타격을 볼 수밖에 없는 시기였다. 경애왕이 친고려 정책을 펼치자 고립될 위기에 처한 견훤은 신라의 정치적 상황을 이용 경애왕 제거의 명분으로 당당히 적국의 수도인 경주까지 군사를 동원하게 된다. 당시 경애왕은 박씨 출신 왕으로 신라 내부에서 상당한 세력을 갖춘 김씨들에게 견제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간파한 견훤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경주로 진격해 김씨 왕족인 경순왕을 옹립시킨다. 이 사건은 후백제가 신라와 함께 고려를 견제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으로 견훤의 외교적 수완과 결단력으로 일구어낸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후에 비록 후백제 내부 분열로 김씨 왕족이 고려와 결탁하게 되면서 후백제-신라의 연합은 실패하고 말지만 한 조직의 효율성 측면에서 리더의 상황 분석능력과 대처능력 그리고 자신의 계획을 밀고 나갈 수 있는 결단력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재 대한민국의 리더는 국민이 뽑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그 역시 경상도 출신이지만 비연고지에서 활동하며 현재의 위치에 오른 인물이다. 그 역시 지난 과거 많은 사람들과 뜻을 같이하며 그들의 지지를 받아 오늘에 이르렀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집권 초기 혈연, 지연, 학연과 관련된 여러 사건들이 유권자들의 눈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또한 북핵 관련 6자 회담 문제라든지 sofa 협정 개정문제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 등 지난 2년간 외교성과를 보면 그가 좋아하는 논쟁과 협의를 통한 결과 도출에도 뛰어나 보이지 않는다. 다만 대한민국 전체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지지 기반이던 양대 노총과의 결별을 선언한 것이 노대통령에게서 찾고자 했던 견훤 리더쉽의 한 부분이 아닌가 한다.
2. 견훤 리더쉽의 한계
견훤의 후백제는 47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생을 마감하였다. 한국가의 행적으로 보이게는 짧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며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