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도시에 대한 검토 (한양을 중심으로)
1. 조선의 도성 한양
(1) 역사적 출발
1392년 태조가 등극하자 이미 기가 쇠진하였을 뿐 아니라 고려의 구세력이 남아 있는 개경을 버리고 신왕조의 기틀을 잡기 위하여 천도를 계획한다. 처음에 한양(서울)에 천도를 지시하였으나 다시 팔도방백에게 도읍터를 물색하도록 하였다. 이에, 전정당문학사(前政堂文學士) 권중화가 계룡산을 천거 1393년 신도 조영에 착수하였다가 경기도 관찰사 하륜의 반대로 중지한 후 모악산(서을 신촌일대)을 후보지로 정하였으나 다시 1394년에 무학대사의 권고에 따라 한양(서울)을 적지로 선정하고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圖監)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국도건설에 들어갔다. 1398년 정종원년에 왕자의 난이 일어나 일시 옛 도읍지 개경으로 옮겼다가 1405년 한양으로 이도하여 조선조 500년의 도읍지가 되었다.
1394년 신도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판문하사(判門下事) 권중하,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 등을 명하고 청룡백(靑龍佰) 심덕부, 좌복사(左僕事) 김계, 전정당문학사(前政堂文學士) 이활, 중추원학사(中樞院學士) 이직 등이 도감판사들과 참여하여 신도의 도시계획이 구성되기에 이른다.
(2) 배치와 축성
1394년 입지는 풍수설에 입각하여 백악을 배경으로 하고 배치는 주례사공기의 왕상제에 따라 `좌묘우사전조후시(左墓右社前朝後市)`를 참작하여 좌에 종묘를, 우에 사직단을 정한 뒤 궁궐, 관청 등을 건설 하였다.
1395년 태조4년에 종묘, 경복궁, 광화문 앞의 관아가 완성되자 성을 쌓기 위한 측량을 4개월에 걸쳐 끝마친 다음 1396년에 백악 꼭대기를 기점으로 동으로부터 시내를 돌아 백악원점까지 전장59,500척, 높이 20척 내외의 성벽을 험한 곳은 석성으로 평산에는 토성으로 쌓았다. 성곽에는 대소8문을 만들었으며 이들 숭례문(남대문)과 흥인문(동대문)은 중층의 문루로 가장 큰 성문이고, 문 …(생략)
(3) 가로망과 시가지계획
(4) 배수계획과 방화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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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로부근의 육조인 관아였고 상업중심을 운종가(세종로에서 종로1가)와 종로, 광통교였으며 가로양측에는 행곽을 조성하였다. 행곽은 행곽은 혜정교(무교동입구)에서 종로2가(종로4가)까지와 창덕궁에서 종로 3가까지, 종로에서 남대문까지였다. 3차에 걸쳐 행곽은 1,361간을 설립하였다(1간은 20척이었다). 이 장행곽은 전(廛)이라 불렀고 이 중에서 국역을 가장 많이 부담하는 육전 여섯을 골라 육의전이라 일컬었다.
이같은 도성내의 시가는 처음 배치에서 ‘좌묘우사’의 주례고공기를 참작하였으나 ‘성벽을 두르기 방 9리, 사방에는 각 3개의 성문, 중앙에 왕궁을 두고 성내는 종횡9도’라는 주례고공기의 왕성제와 BC 1900년에 준공된 격자형의 중국의 장안성과는 달리 독창적인 시가화계획이었다. 태종이 한양 재천도후 가로는 태조때의 그대로였던 것 같으나 중로와 소로는 이미 민가가 침범하여 건립되어 버렸으며 이 때문에 주택가에는 막다른 골목(cul-de-sac)이 생긴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한국적이고 독창적인 도시계획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4) 배수계획과 방화시설
우리 나라에는 상수도시설이 조선조까지도 전혀 없었던 것에 비하여 하수도시설은 1405년 한성 도성 건설때에 개천(청개천)을 굴착함으로써 도시하수도시설의 효시를 이룬다. 한성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싼 분지로 한강이 가장 가까운 남쪽이 대멱산(남산)으로 막혀 있어 비가 올 때마다 홍수를 겪어야만 했기 때문에 제1차로 태종11년 5만명의 부역으로 서울시내 모든 유수를 개천에 도입배수하도록 하였다.
그 후 조정에서는 매년 양안석축을 영조49년까지 13년에 걸쳐 완성한 후 ?천사란 관서를 설치 준설과 지형파괴를 감시하였고 수표교에 준설기준을 마련하였다. 하수가 집결되는 동대문 부근에는 3개의 수구를 가설하였고 청계천수류를 배출할 5개 아치로 된 5개수문과 서울운동장 북과 서측의 물을 처리하는 2대수문, 동대문 동방 50 m지점에 또하나의 흐르는 곳을 마련하였다.
또한 도성내의 건축물은 목조였기 때문에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