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족보 문화
<서론>
현대 사회가 급속하게 변화 합에 따라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문화 중 하나인 족보도 많은 변화를 맞게 되었다. 여성의 이름이 제외되었던 시기가 가고 점차 남녀평등 의식이 확장되면서, 족보에서도 여성의 이름을 찾아 볼 수 있게 되어진 것이다. 하지만,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점차적으로 우리 사회는 인간성이 상실해 가고 가족 해체의 바람이 불고 있다. 우리 주변 곳곳에서도 쉽게 이러한 가족 해체의 문제를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반하여 가족의 중요성은 점차적으로 확대되어지고 내 가족 , 내 친족의 개념이 중요하게 대두 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로인해 족보 또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 올바르게 족보에 대하여 알고 있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 우리는 여기서 족보란 무엇이며 이러한 족보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 어떠한 변화를 겪어왔는지, 현대사회 뿐 아니라 예전부터 우리에게 족보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등 족보에 관해서 알아보고, 현대사회에서 족보의 개선점과 나아갈 방행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본론>
■족보란?
족보라 함은 모든 보첩(譜諜)을 통틀어 지칭(指稱)하는 대명사(代名詞)이며 동일씨족(同一氏族)의 관향(貫 鄕)을 중심으로 시조(始祖)이하 동족(同族)의 발원(發源)에 대한 사적(史蹟)과 선조(先祖)로부터 본인에 이르기까지 명(名). 휘(諱). 호(號)를 사략(事略)을 상세히 수록(手錄)하여 종족(宗族)의 근원(根源)을 밝히고 자랑스런 선조(先祖)의 행적(行蹟)과 동족간(同族間)의 소목(昭穆)을 알려 화애돈목(和愛敦睦)함을 목적으로 편 수(編修)한 보첩(譜諜)을 말함. 즉 보첩이란 한 종족(種族)의 계통을 부계(父系)중심으로 알기 쉽게 체계적으로 나타낸 책으로, 동일혈족(同一 血族)의 원류를 밝히고 그 혈통을 존중하며 가통(家統)의 계승을 명예로 삼는 한 집안의 역사책이다.
■족보의 유래 및 역사
족…(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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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러한 계도(系圖)에 의하면 같은 항렬에 있는 여러 인물이 같은 자근(字根)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것은 당시 이미 계보에 관한 관념이 일반화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문종(文宗)때에는 성씨?혈족의 계통을 기록한 부책(簿冊)을 관에 비치하여 과거에 응시하는 자의 신분 관계를 밝혔으며, 더구나 그 당시는 족보의 유행이 한창이던 송(宋)과의 교류도 빈번하였던 시대여서 족보의 유행은 하나의 필연적인 현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만 그것이 당시에는 출판 사정이 쉽지 않앗기 때문에 필사(筆寫)에 의해 족보가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국초(國初)부터 족보의 편성간행의 필요가 더욱 절실하여 급속히 진전되었다. 왕실 자신이 벌족 정치의 국가형태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유교(儒敎)를 국시로 삼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성족(姓族)파별로 가승(家乘)을 명백히 할 필요가 생겨 족보가 없는 집안은 행세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족보가 성행하였고, 그 체제도 현재의 형태와 같이 완성되었다. 당시는 원시적 부족사회의 형태와 같은 동족의 집단부락이 각지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과 붕당학파(朋黨學派)의 싸움이 치열하여 배타적 관념으로 인해 자연 동당(同黨)? 동파(同派)?동족(同族)의 일치단결을 공고하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왕실의 계보록이 중요시되어≪ 원계보( 源系譜) ≫와 ≪종실보첩(宗室譜牒)≫이 그후 여러 차례 수보(修補)되었으며, 귀족?권문에서도 수보 의 기운이 싹트게 되었다.
그 후 일제치하에 있어서는 이민족의 지배 때문에 학문이나 일반 사회문제의 연구보다도 관심이 동족결합에 쏠리게 되어 족보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매년 발행되는 각종 출판물 중 족보발행이 1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보면 당시 사회에서는 역사를 연구하고 경제를 배우고, 문예를 즐기고, 사상을 연마하는 것보다 일문일가의 기록을 존중하는 것을 훨씬 더 중대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즉